[가볼만한 곳] 감꽃당, 운현궁 지나 계산초당에 이르다

노안당

몇 년 전에는 나를 키운 지인이 모두 직장 동료이거나 학교 동창이었다면, 지금의 나를 키우는 지인은 모두 글로 만난 지인이다. 이 둘 차이를 한마디로 하면, 만나는 순간에서 끝나는 순간까지 이야기가 감꽃처럼 주렁주렁 꿰인다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 후미진 골목 ‘호반’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이 후미진 곳은 낙원상가 마산아구찜 골목길 사이로 들어가 모텔들이 쫙 나오면 거기서 얼른 좌회전하여 다시 우회전으로 꺾으면 나온다.

어제(10월 11일) 따라 햇살이 너무 좋아 창의문에서 내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따라 걸은 후 청운어린이집에서 급경사 골목길로 내려와 청와대, 북촌, 인사동을 거쳐 ‘호반’에 도착하니 11시49분이었다.

사마귀

따사로운 가을 햇살마냥 목이 말라 우선 맛깔스러운 버섯 무침에 막걸리 석 잔을 원샷 한 후 오늘의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손님보다 먼저 사마귀 한 마리가 옆 테이블에 씩씩한 기상을 보이면서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온다. 이놈의 기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니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집은 가을 병어조림에 서울 물김치가 일품이라 세상 돌아가는 속살 이야기를 쉼 없이 하여도 꿀맛 같은 밥의 유혹은 떨치지 못해 얼른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다들 죽치고 앉아 떠는 수다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여 구구갤러리로 이동한다.

구구갤러리 김형길 초대전 출품작

구구갤러리에서는 김형길 초대전을 하고 있었다.

“나의 정체성은 통영이다. 그리고 생명과 사랑이다”로 시작하는 작가노트를 읽고 공대생답게 “‘통영’ 대신 ‘목포’, ‘영해’를 넣어도 뜻이 되지 않느냐? 작가만의 치열한 내면의 언어를 잘 찾을 수 없다”고 큐레이터에게 이야기하니 “작가가 사랑한 통영 바다의 일렁이는 윤슬이나 어부의 무한 네모 그물이 보이질 않느냐”고 반문한다. 예술에는 젬병인 내게 이 작가가 더 많은 설명을 해주었지만 내 스키마를 타고 시냅스를 연결해 줄 능력 부족으로 먼 달나라 별나라 이야기가 된다.

구구갤러리에서 운현궁으로 발길을 돌린다. 조선말 일본에 뒤치기할 유일한 기회를 잡은 대원군을 볼 때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몰아낸 그 여세로 개화의 방향이라도 잡아 근사한 ‘동도서기(東道西器)’라도 한 권 지었다면, 그 서구의 거대한 물결을 사마귀 한 마리가 수레 바퀴를 떡하니 막고 선 당랑거철의 위용이라도 남겼을 터인데…어찌하여 권력을 잡은 기개로 권력만 잡으려고 애썼는지 운현궁의 노안당(老安堂)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답은 없었다.

이제, 우리는 낙원상가 빌딩으로 가려진 백탑을 뒤로 계산초당(桂山草堂)을 향한다. 계산초당은 연암 박지원이 만년에 지은 집으로 여기서 죽고, 개화파의 시조이자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에게로 이어진다.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좌측에 ‘V’ 자형 거대한 백송이 보인다. 북학파 집집마다 심겨 있었던 백송,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에서도 있었고, 이곳 연암 박지원의 계산초당에도 있다.

노송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지은 서유구(徐有矩)는 안동김씨 세도 시조격인 김조순(金祖淳, 순조의 장인)과의 논쟁에서 연암 박지원을 옹호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유구가 김조순과 함께 규장각에서 근무할 때, 연암의 학문 실력으로 언쟁을 하였는데, 정통 고문에서 벗어난 박지원의 문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던 김조순은 박지원에 대해 “<맹자> 한 장의 구두도 제대로 못 뗄 것이다”라고 혹평하자, 서유구는 “연암은 <맹자> 한 장을 지을 수 있다”며 맞섰다. 그러자 김조순은 화가 나서 “그대가 이 정도로 문장을 모르는 줄 몰랐소. 내가 있는 한 문원(文苑)의 관직은 바라지 마시오”라고 하자, 서유구도 “굳이 맡고 싶지 않다”고 응수한다.

문원은 대제학의 별칭으로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할 정도로 비록 정2품의 벼슬이지만, 학자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에서 문형(文衡)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는 그렇게 계산초당의 가을 햇살이 윤보선 생가 뒤 담장으로 넘어갈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고, 내 또 다른 지인 이윤성 님을 불러 함께 머무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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