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시선] 영양 두들마을 이문열 생가에서 든 상념들
뜰 안에는 곧은 향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250년을 버티고…
“나는 김구 선생의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말씀을 실천한 분이 이문열 소설가라 생각합니다. 가난할 때 문화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물러남의 문화라면, 풍요로울 때 문화는 기부방곡(旣富方穀)의 나아감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풍요로 말미암아 감성팔이 표피적 글이 난무하는 세태에서, 우리의 정신을 올곧게 해주는 새로운 글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러한 일을 수행할 최적임자로 이문열 소설가를 윤석열 정부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임명코자 합니다.”
나는 윤석열 정부의 초대 문체부 장관으로 이문열 소설가가 제청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우리 문단에는 <사람의 아들> 이후 이 책을 능가하는 주지적 글을 아직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접시꽃 당신도’ 되는데 ‘사람의 아들’이 되지 못할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는 경계면에서 터지고 깨져 분출한다. 농경시대와 산업시대의 경계면, 가난과 풍요의 경계면, 사랑과 질투의 경계면, 전쟁과 평화의 경계면, 예술과 외설의 경계면, 삶과 죽음의 경계면, 이 경계면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파열음을 내고 자기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바로 그 지점을 정확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고력과 통찰력을 갖기 위해서는 동서양 철학은 물론 역사와 경제, 문화의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 글들이 감성팔이로 점철되는 이유가 글재주는 많으나 깊은 사고력 부재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이런 표피적 글로서는 ‘문화의 힘’을 이끌어낼 수 없다.
과거를 해석하여 부족한 것은 세우고 잘한 것은 드러내고, 현재를 해석하여 갈등을 발전으로 승화시키고, 미래를 해석하여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외로 뻗어나갈 힘을 만드는 것도 문화이기 때문이다.
영양 석보 두들마을에 가면 재령(載寧) 이씨 집성촌이 있다. 두들마을의 입향조(入鄕祖) 석계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이곳에 은거하였다. 우리는 그가 부끄러워한 견처(見處)는 알 수 없지만, 퇴계의 재전(再傳) 제자인 경당 장흥효(張興孝)의 제자로 주리학(主理學)을 파고 들었고 <석계집(石溪集)> 6권을 남긴다.
우리는 두들마을 입향조인 석계 이시명의 <석계집>을 기억하기보다는 그의 부인이 쓴 최초의 한글 요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더 많이 기억한다. 사대부 여인 장계향(1598~1680)은 그의 스승인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로서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나 시·서·화에 밝았고, 19살 때 이시명에게 시집와 자식 열을 낳고 셋째 아들을 이조판서에 앉히고, 드디어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길 진갑이 된 나이에 이 책을 쓴다.
책 서두에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 했다. 말미에 “시집온 지 사흘만에 부엌에 들어 손을 씻고 국을 끓이지만, 시어머니의 식성을 몰라서 어린 소녀(젊은 아낙)를 보내어 먼저 맛보게 하네”로 끝맺는다.
경북 영양과 청송은 청양고추의 ‘청양’ 두글자를 따올만큼 대표적 고추 산지인데 책을 지을 당시에는 아직 고추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석간고택(石澗古宅)에는 수령 250년, 높이 20미터, 둘레 2미터가 되는 향나무 한 그루가 금강송처럼 곧게 하늘로 치솟고 있다. 우리가 궁궐이나 서원에서 보는 향나무처럼 뒤틀리고 꾸불텅하지 않다.
그의 주손 이장희씨는 “석간고택보다 이 향나무를 더 좋아한다”고 자랑한다. “나는 먼저 옛집을 찾았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대지 5백평에 40간쯤 되는 고가로 아버지 위로 9대가 살아 온 집이다.” 이문열 작가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에 나오는 글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안다. <석계집>보다 <음식디미방>에 나온 글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것은 글의 생명력 때문이다. 하루를 지나 사라질 글이 아니라 수백 년 지나도 살아날 글이 필요하다. 그것이 문화가 아닌가? 그것이 문화의 힘 아닌가?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안다. 몰락한 가문의 남인 후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가 검남(劍南)으로 살기를 원했던 것처럼, 이곳 두들마을 재령이씨들은 스스로 산수 좋은 곳에 터 잡아 겉으로는 안빈낙도를 즐기지만, 안으로는 내면을 파고들어 때를 기다렸다는 것을.
그렇지 않은가? 한 집 건너 시인의 집이요, 두 집 건너 소설가의 집이요, 세 집 건너 의사의 집이니, 오호라 두들마을이여, 뉘엿뉘엿 기왓장은 이끼가 내려앉아 녹청색을 띠고 소나무 기둥은 골이 파여 손이 베일 정도로 낡았지만, “배우지 않은 집안에는 미래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