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시선] 청송 ‘객주문학관’서 고창 ‘미당 서정주’를 떠올리다
“잘 짜인 스토리는 작가의 우상을 피해 가고”
“단어 하나 찾는데 밤을 꼬박 새우며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죠. 그러다 베란다에 나가면 새벽 4~5시경, 멀리 한강 변 가로등 불빛이 안개에 잠겨 있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소설가 김주영의 고백이다. 어디 김주영 작가만 그러하겠는가? 글은 자기 피를 잉크 삼아 적는 문자가 아닌가? 내가 김주영 작가를 처음 인식한 것은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이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 박사논문 쓰듯 자료를 수집하는 준비성 때문이다. “오호라, 이제 우리나라도 제법 묵직한 소설이 나오겠구나!”라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사방 100리 안에 공장 하나 없고 기찻길도 없는 지역, 김주영이 시인이 되겠다고 하자, “지금 굶는 것도 성에 안 차냐”며 온종일 우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그가 자작시 몇 편을 박목월 시인에게 보여주었다. 박 시인은 “자네는 운문에 재질이 없어”라고 핀잔을 주었다. 김주영은 소설가로 데뷔한다.
소설 <객주>는 1878~1885년 구한말 팔도를 떠돌아다닌 보부상 이야기다. 나라는 붕괴 직전으로 정치와 경제, 안보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다. 더불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 계급마저 서서히 균열을 보이고, 기득권층은 사농공상을 붙들어 매려고 더욱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무릇 한 사회가 붕괴하기 직전에는 “가진 자는 악착같이 지키려고 발악하고, 새로 부상하는 자는 이를 엎으려고 더 거칠게 몰아붙이는” 혼돈의 시대다.
작가는 무엇을 담고자 했는가? 사회주의 작가처럼 계급투쟁의 역사의식을 담아 악덕 지주와 패악질 양반의 몰락을 그리고자 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저 허물어지는 구한말 가장 열악한 환경에 직면한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를 담담하게 그리고 싶었다.
“여기 있는 나로 말하면 경기 안성 땅 내로라 하는 대가 집 둘째 자제와 결발부부하였네. 하지만 내 행적이 좀 더러웠지. 몸볼적에 차던 서답 글방에 끌러놓기, 밥푸다가 이 잡기, 머슴 잡고 어린양하기, 코 큰 총각 동이술에 섬밥지어 대접하기, 밤이면 마을 돌고 해뜨면 낮잠자기, 양식 퍼내 떡 사먹기, 속옷 벗고 추천(그네)하기, 젊은 중놈 잡고 혀 짧은 소리, 상인 잡고 허벅지 보이기, 방사하는데 문 열기, 우물가에서 뒷물하기, 양도가 합세할 때 엉덩이 잡아빼기, 망부석에 똥 싸기, 밋남진 본부(本夫) 뒤에 두고 소대남진(사잇서방) 보느라고 남의 집 축담 위를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다가 간통죄로 조리돌림 당하고 마을에서 좇겨나 궁중패에 들었다네.”
청송 진보장터에서 주왕산으로 가는 31번 국도를 따라 10분을 가면 언덕배기에 폐교된 진보제일고등학교를 리모델링 한 객주 문학관이 나온다.
“청송군이 찾아오는 관광객에 비해 이렇게 투자하는 것이 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 정도로 3층 건물을 통째로 개조하였으니, 청송군의 배포에 혀 내두르거나, 지자체의 눈물겨운 수입 창출 정성에 감동하거나, 분명 둘 중 하나다.
문학관은 건물 한가운데에 있는 이재효 작품 ‘wood (apple tree-청송)’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전시실이 있고 우측에는 연수관이 있다. 지자체의 예산 낭비와 작가의 우상화에 불편한 심정을 달래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본격적인 투어는 3층부터”라는 큐레이터의 말에 따라 마지못해 3층으로 올라간다.
나는 내 불편한 선입견을 벗고 <객주>에 몰입하는데 불과 몇 분이면 충분했다. 어릴 때 간간이 보따리 장사꾼이 동네를 드나들 때면 인정 많던 할머니가 꼭 점심을 대접했던 기억과 시골 5일장터를 그대로 구현한 모습을 소설 속의 문장과 대비시켰고, 더불어 글 쓸 때의 작가 심정을 살며시 집어넣으니 ‘우상화’라는 부담이 스스럼없이 사라지고, 오랜만에 문학관을 답사한 느낌이 쏙 들었다.
전북 고창에 가면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이 있다. 몇 년 전 늦가을 그곳을 방문한 나는 깜짝 놀라 미당 서정주에 빠져들 틈도 없이 살며시 뒷걸음으로 빠져나오기에 바빴다. 하필 그날 따라 지역 시민단체들이 소음에 가까운 확성기에 꽹과리를 치면서 “민족 반역자 친일 서정주”를 타도하고 있었다.
서정주 시인은 1915년생이다. 태어나서 30살이 되어야 맞이한 해방을 일제에 부역하였다는 죄목으로 반일을 이념화하는 데에 그만 질렸다.
북한에 소월이 있다면 남한에 미당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좋은 상품을 이념의 광풍으로 날리다니, 고창도 청송만큼이나 지역경제를 위해 눈물겨운 몸부림이 아닌가? 이념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문학관에는 그저 쓰다만 두건과 시뻘건 현수막이 확성기의 소음만큼 공허하게 퍼졌다.
나는 청송 객주문학관을 뒤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곳곳에 걸려 있는 정치 현수막 글을 읽고 있자니, “뼛속 깊이 파고든 가난은 에미 애비마저 등을 돌리게 하고, 그럴 때일수록 더 엄격하게 된서리 같은 규율을 지켜야 산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보부상의 규율이 떠 올라 씁쓸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천박한 언어와 문자를 이어가는 이 행태를 향해 보부상 규율 제7조 “언어가 공손하지 못한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로 단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