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 칼럼] 철원 직탕폭포에서 발견한 무위無爲의 도道
한 아이가 태어난다. 하는 일이라고는 울고 먹고 잔다.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똥만 싸는 아이, 빈틈 투성이다. 아기에게 빈틈이 없다면 귀엽지 않다. 오히려 빈틈이 많고 허점투성이라야 귀엽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이제 아이가 점점 성장하여 옹알이하고, 사물을 식별하고, 말문이 터져 문자를 알게 되면, 세상 이치를 다 안 듯 틈이 메워져 빈틈없는 인간이 되어간다. 사리 분별력이 생겨 시비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날마다 평론가가 되어 세상 온갖 일에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 내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왜냐고? 세간의 일이란 흐르는 물처럼 날마다 새로운 일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일은 날마다 다른 환경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 일이란 주인공과 등장인물, 시대와 장소만 바뀐 거대한 대하소설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틈을 메우려고 아무리 파고들어도 틈이 메워지지 않아?” 누구의 말일까? 사랑하는 연인을 만났을 때의 하소연이다. 분명 상대의 틈을 봤는데 그 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안타까움, 내가 틈이 있다고 오해한 것일까? 아니면 파고들 방법을 모르는 것일까?
자, 봄이 되어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강원도 산간지방은 낙석으로 몸살을 앓는다. 겨우내 바위 틈새로 들어간 물이 얼어 바위가 갈라지고 터져 도로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틈만 있으면 아래로 파고드는 물질, 형체가 없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을 이기는 상징이 된 물질. 바로 물은 누구나 알 수 있기에 그만큼 직관적이다.
그런 부드러움으로 틈을 파고들면 그가 나를 받아들여 줄까? 만약 그가 바위처럼 단단하여 틈이 하나라도 없다면 그런 바위를 뚫을 수는 있을까? 이것이 물질세계라면 가능하다. 양자물리학에서 말한 ‘중성미자’가 그런 물질이다. 중성미자는 1초 안에 700억 개가 손톱만한 면적을 지나가지만, 우리는 느낄 수 없다. 도대체 느낄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노자>는 “없음(無有)만이 틈새가 없는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無有入無間)”고 하였다(제43장). 천하 절정 고수는 검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인다고 하여, 두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가여운 척이라도 하면 틈이 생길까?
아니다. 무유(無有) 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깔끔을 떠는 자, 남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는 자, 안으로 삐치는 자, 냉혹한 분석자, 정나미 뚝 떨어지는 자,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는 자, 그런 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너울너울 춤을 추게 만드는 것은 네가 아닌 내가 빈틈투성인 어린아이 너머에 존재하는 본지풍광(本地風光), 텅 빈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래야 다함이 없는 무위(無爲)가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는 이익(利益)이 됨을 깨닫게 되며 이것이 참으로 희귀한 가르침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