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시선] ‘서툴러 흠결 많아도’ 천하 바르게 가능할까?
사람은 익숙한 것에 벗어나 생경한 충격을 만날 때, 마음은 불연속 경계면을 타고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간다. 그때 멈칫하는 마음이 생기고 뭔가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정지상태에 이르게 된다. 마음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마음 멍한 상태가 되는 데 이는 불연속 경계면을 타고 흐를 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사행길에서 만난 연암(燕巖) 박지원의 천리 지평선(地平線)이다. 평생을 언덕배기와 산 아래에 머물렀던 조선 사람이 난생 처음 지평선을 바라보자, 그만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이로구나” 하면서 호곡장론(好哭場論)을 펼친다.
사람의 눈물이 울컥하여 그렁그렁하게 흘러내릴 때는 인위적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러하듯이 평소에 지각하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지는 그 짧은 순간이 절대 세계의 경계면을 만나게 되는데 그 순간을 잡지 못하면 다시 도루묵이 되어 상대의 제자리로 돌아온다.
연암이 지평선을 만나 전율처럼 불연속 경계면을 타고 흘렀다면, 너무 큰 것을 마주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가? 나는 두려움(敬畏)을 느꼈다. 내 경험으로 얻은 공포와 경외감은 단 두 곳뿐이었는데, 강의 한 폭 허리가 그냥 꼬꾸라지듯 쏟아지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마차길 넓이의 도로에 초고층 건물이 즐비한 뉴욕의 뒷골목이었다.
이러한 너무 큰 것에서 얻은 <노자>는 특이하게도 ‘없어 보이는 듯’한 인식을 얻는다. 구체적으로 너무 크게 이룬 것(大成)은 다소 모자란 듯(若缺)하고, 너무 크게 찬 것(大盈)은 다소 비어 있는 듯(若沖)하고, 너무 크게 곧은 것(大直)은 다소 굽어 보이는 듯(若屈)하고, 너무 크게 정교한 것(大巧)은 다소 서툰 듯(若拙)하고, 너무 뛰어난 언변(大辯)은 다소 어눌한 듯(若訥)한 관점을 얻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너무 큰 것으로 인한 경외감 혹은 두려움, 공포가 오히려 거꾸로 ‘없어 보이는 마음’으로 바뀌는 점이다. 근기 낮은 이는 허투루 이를 무심하게 흘려보낼 것이고, 근기가 중간인 자는 애써 이를 부정할 것이고, 근기 매우 뛰어난 자만이 불연속 경계면을 타고 마음이 툭 터지는 절대세계로 들어간다.
이러한 염려로 <노자>는 너무 커서 없어 보이는 것들이 실은 ‘쓰임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고(其用不弊)’, ‘사용함에는 모자람이 없다(其用不窮)’고 간절하게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눌한 말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서툰 기교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굽어 보이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비어 있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모자란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사물의 궁극 이치(道)에는 한참이나 멀었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에서 다시 한번 절대세계로 진입하는 현상을 우리 몸을 통해서 설명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몸뚱이에 뜀박질하면 열이 펑펑 솟아나 추위를 가시게 하듯, 바깥쪽(外境)이 더우면 안쪽 내면을 고요히 하여 열을 내리는 이치 또한 같다고 한다.
언제나 잘남보다 모자람에, 많음보다 부족함에, 완벽보다 결함에,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강함보다 약함에 머문 노자가 ‘맑고 고요함(淸靜)’으로 천지를 바르게(正) 한다는 말은 의외다. 필자라면 ‘서툴러 흠결 많음(拙缺)’으로 천하를 바르게 하겠다고 감히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