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차마고도⑥] “차 마시고, 경극 보고, 귀지를 후비다”
“한 나그네가 있었다. 허리에 검 하나만 차고 있을 뿐 차림새는 참으로 초라했다. 눈썹은 짙고 입술은 붉었으며, 눈동자는 총명해 보였고, 뺨은 두툼했다. 늘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저속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이는 스물대여섯.”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평역 <삼국지>의 첫 문장이다. 깡촌에서 읽을거리라고는 어른들이 읽다만 중국 고전의 잔재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최종 합격한 그해 중3 겨울, 이웃집에서 빌려다 본 <삼국지>는 1, 2권 읽고 3권 건너뛰고 4권을 읽었지만, 그 감동은 여전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삼국지>의 찐팬이 된 것처럼 중국인들도 <삼국지>의 찐팬이다. 중국인들의 마음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임금은 노가(老家) 사상으로 어리숙한 듯 털털하기를 바라고, 관료는 유가(儒家) 사상으로 빈틈없이 반듯하기를 바란다.
이 바람에 딱 맞는 인물이 역사상에 있었으니, 바로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촉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이다. 유방은 ‘건달’로 시정잡배와 어울려 술과 여자를 좋아한 인물이며,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데다, 도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런 그가 조참(曹參)과 소하(蕭何)의 꾐에 빠져 패현에서 봉기한 지 7년 만에 해하에서 항우를 패배시키고 황제가 된다.
그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덕목은 능력만 있으면 출신에 관계없이 ‘실용’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그릇 때문이다. 그의 뱃속에는 여러 척의 배가 들어 있을 만큼 ‘포용력’이 넓었으며, 진시황제의 행차를 보고 “오호라, 대장부가 저래야지” 할 정도 ‘야망’도 있었다. 그는 천하를 말 등에서 얻었다 하여, 현실을 모르고 경전만 읽는 범생이 같은 유생을 몹시 싫어했다.
제갈량은 누구인가? 유방을 빼다 박은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로 모셔 온 인물로 나이 차이가 무려 20년이나 되지만, 늘 스승(軍師)으로 모시고 살아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한 관우와 장비가 시기할 정도였다. 관우가 이들의 관계에 불평을 쏟자 “나는 물이고 제갈량은 고기라며(水魚之交), 물이 고기를 만났다”라고 오히려 두둔한다.
그런 그가 백제성에 죽을 때 유언으로 “아들(劉禪)이 부덕하면 대신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려 달라”고 제갈량에게 부탁하나, 오히려 이것이 제갈량이 두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여,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면서 위나라를 치기 위해 오장원으로 다섯 번이나 출격하고, 결국 적진에서 죽는다.
유비가 제갈량을 맞이하려 삼고초려 할 때,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논하고, 이 원대한 계획을 실현시켜 변방에 있던 촉이 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하지만,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하기를 “촉 땅은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렵습니다”라고 넌지시 말한다.
촉 땅, 지금의 쓰촨성을 구글 위성사진으로 보면 남북한을 합친 크기의 거대한 분지로 주위에는 높은 산과 깊은 강이 가로막아 천혜의 나라 터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대륙을 통일하기에서는 대군이 오히려 좁은 협곡을 빠져나와야 하니, 이는 장점이 단점이 바뀌는 형국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선왕(先王)인 유비가 죽자, 머물러 있으면 안주하려는 촉을 경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절벽 사이로 잔도
(棧道)를 만들어 위(魏)를 공격하게 된다.
그런 무후사(武侯祠, 제갈량을 모신 사당)를 차마고도의 마지막 여정으로 선택하다니, 어릴 때 홍콩 배우를 좋아하면 홍콩 가고 싶듯이, 내 마음은 인천공항을 떠날 때부터 들떠 있었다.
나도 삼국지 주인공인 유비와 관우, 장비, 마초, 조자룡과 함께 검각(劍閣)으로 내달리기도 하고, 울면서 마속을 자른(泣斬馬謖) 제갈량의 한숨이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낙산대불(樂山大佛, 러산대불)의 큼지막한 불상의 관람을 마치고 청두시(成都市)로 되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이드가 어디를 가나 3대 맛집, 3대 볼거리, 3대 즐길거리가 있는데, 쓰촨성 사람들의 3대 즐길거리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흥에 겨운 우리 일행은 이것저것 아무것이나 말하나 모두 틀린 대답이다. 아마 정답을 맞히려고 대답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가이드가 입을 뗀다.
“첫째는 차를 마시는 것이고 두번째는 경극을 보는 것이고 마지막은 귀지를 후비는 것이라 한다. 모두 마시고 보고 후빈다.”
우리 일행이 간들간들하게 무후사에 도착하니 한 발짝 떼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중국인이 무후사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틈 속에 가이드의 설명은 귓등으로 듣는 체 만 체 하면서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일단 현장의 시끌벅적한 느낌을 서울의 고즈넉한 느낌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사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후사를 빠져나오면 청나라 때 지은 금리(錦里, 비단마을) 거리가 나오는데, 여강고성(麗江古城)을 맛본 우리에게 이 거리가 성에 찰 일은 없지만, 길거리에 수없이 늘어선 음식들이 나를 유혹한다. 과연 내가 쓰촨성 음식 몇 개를 먹을 수 있을는지 몹시 궁금했고, 국가기밀로 분류된 변검을 본다는 마음에 들뜨기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마지막회 ‘차마고도(7), 후지(後識), 자기야 사랑해’로 이어집니다. 사진은 낙산대불, 무후사, 금리거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