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차마고도④] 여강고성, 자유여행의 ‘천국’
“문득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는 중이다.” 또 “맛난 음식 앞에 두고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정말 강하거나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또 외로운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보이지 않은 그 마음. 분명히 존재하여 뚜렷이 인식되나 형체도 알 수 없고, 표현할 길도 막막한 그 마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머무는 그 순간을 낚아채어 그 대상에 마음을 얹혀서 보내는 것.
이른 새벽 산책길에 미로처럼 얽힌 돌바닥을 봤지. 그 돌에도 머무는 마음이 있어 사진을 찍어 얼른 보냈지. 줄지어 늘어선 고택의 기왓장을 봐도, 용마루 밑 개(?)자 모양의 나무 문양을 봐도, 줄지어 늘어난 붉은 홍등에 비친 특이한 한자를 봐도, 알록달록 색실로 수놓은 나시족 전통 쇼울을 봐도, 깍두기 머리에 배 불뚝 나온 남정네 얼굴을 봐도, 시끌벅적 카페에 나란히 선 연인의 마주 잡은 손을 봐도, 차곡차곡 진열된 보이차의 깜짝 놀란 가격을 봐도, 한쪽 문턱에 걸터앉아 졸고 있는 노인의 어깨를 봐도, 사방가(四方街)에서 춤추는 여인네의 접시꽃 같은 머리 장식을 봐도, 그 무엇이든 마음이 머물면 그렇게 했네. 하루 24시간이 모자랐지. 정말로. 참 대견해. 짠하기도 하고.
어찌 머무는 그 마음을 사진만으로 표현할 수 있겠어. 어느 기업 총수가 초등 동창한테 1억원을 보냈다는 기사를 봤지. 난 그런 것에는 감동이 없어. 그냥 ‘좋아’ 정도야.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급히 글 쓰느라 맞춤법도 틀리고 문맥도 맞지 않는 글 한 편이 더 좋아. 돈 받고 쓰는 글도 아니요, 높은 분에게 보내는 아부성 글도 아니요, 그냥 순간의 순수한 그 마음. 느낌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그 마음을 쓰기 위해 가다 서고 가다 서고. 정말 좋지. 좋아. 그 글을 받으면 날아 갈 것만 같을 거야. 그 무엇이든 마음이 머물면 그렇게 했네. 하루 24시간이 모자랐지. 정말로 참 대견해. 짠하기도 하고.
어디 그뿐이랴? 미로처럼 얽힌 여강고성(麗江古城, 리장고성) 뒤 골목길을 아찔하도록 쏘다니다가 호텔에 들어와 문득 창문을 여니 용마루 위에 반달이 큼지막하게 떠있네. 얼른 달려가 사진을 찍고 바로 보냈네. 혹여 몇 만 리나 떨어진 거리지만, 내가 보는 그 순간 그 달을 볼까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똑같은 달을 똑같이 볼 수는 있으니까. 내 마음을 달빛에 담아 그분에게 보냈으니 정말로 참 대견해. 짠하기도 하고.
여강고성 제1의 아름다움은 길 끝에 매달린 집이다. 한 사람이 걸을 때 길은 보인다. 두 사람이 걸을 때도 길은 보인다. 세 사람이 걸을 때도 길은 보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걸을 때는 길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인다. 사람이 보이면 술집만 보이고, 가게만 보이고, 식당만 보이고, 학교만 보이고, 관공서만 보이고, 사원만 보이고 길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람이 사라진 이른 새벽 텅빈 길을 보면 길끝마다 방울방울 매달린 집이 보인다.
여강고성 제2의 아름다움은 미로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알록달록 매끄러운 돌길이다. 여강고성은 800여 년 전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만들어진 고성이지만, 외곽을 빙 둘러싼 성(城)도 성문(城門)도 없다. 그럼, 외적 침입을 어떻게 막는다고?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과 도로변에 놓인 수로, 주택 사이로 흐르는 넓은 하천이 적의 진로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이 지역을 지배한 목(木)씨 왕가가 네모 모양의 성을 쌓으면 곤(困)이 되어 망한다는 전설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하지만 후손들의 전설은 열린 마음으로 그렇게 지었다고 자랑한다. 저 멀리 떨어진 만리장성은 모든 것을 꽁꽁 걸어 잠갔지만, 여강고성은 사람도 열고, 믿음도 열고, 물건도 열고, 마음도 모두 열어젖히니 덩달아 내 마음도 열렸다.
여강고성 제3의 아름다움은 낮은 볼거리요 밤은 천국이다. 여강고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다. 고즈넉한 기와집과 알록달록 길, 주택 사이로 흐르는 시내가 없다면 여기는 사막의 환락가 라스베이거스요, 서울의 화려한 홍대거리다. 밤의 고성은 비집고 다녀야만 걸을 수 있고, 애써 들으려 해야만 들을 수 있고, 볼 것이 많아 주위 결핍에 시달리는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다.
늘어나는 한 치수의 옷을 줄이려는 긴장감으로 힘겨운 유혹을 참아야 식당을 스쳐 지날 수 있고, 만지작거리는 지갑을 애써 외면해야만 가게를 스쳐 지날 수 있고, 창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의 야릇한 미소를 벗어나야 술집을 스쳐 지날 수 있다.
고대와 현대, 고급과 저급, 자유와 속박, 방종과 절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핵심과 변방, 소수와 다수, 품격과 천박, 절제와 환락의 극명한 대척점이 날마다 존재하는 곳, 바로 이곳 여강고성, 자유여행의 천국이다.
*5부 ‘차마고도, 인상여강(印象麗江), 사랑이 무엇이 관대 왜 그리 짠하냐?’로 이어짐. 사진은 여강고성, 속하고진, 백사고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