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시선] 위당 정인보의 ‘첫사랑’…110년 전 서울-상하이

1931년, 38세 위당 정인보. 아내 성씨를 잃은 지 18년이 지난 뒤였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년)의 서사(抒思), 한문으로 된 글이라 번역된 산문을 읽었다. ‘첫사랑’으로 번역된 동갑내기 열세 살 아내 성씨(成氏)를 그리는 글이다. 글이란 읽는 사람의 몫이다. 어떻게 해석되는지는 읽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식이 나온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필자는 인문학도가 아니라 공학도 출신으로 남들이 이미 철 지난 이데올로기라 말하는 ‘부국강병’이 국가의 존재이유라 믿어 늘 그런 관점으로 읽고 해석한다. 정인보의 ‘첫사랑’이라는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글이 얼마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지를 스캔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이 어떻게, 그렇게 사유가 되었는지, 시대환경과 그 뒤 배경이 그림자처럼 떠오른다. 이미 내 뇌는 그렇게 스키마 되어있다.

“나는 열세 살 때 아내 성씨(成氏)와 결혼하였는데 아내도 그때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부터 장모님을 쫓아 때때로 우리 집에 와서 나하고 놀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열세 살 나이에 결혼했다. 혼인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나라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남산에 있는 소나무는 성장을 멈추고 솔방울만 잔뜩 맺는다. 성장 환경이 가혹하여 언제 죽을지 모를 때 나타난 현상이다.

늙은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이유도 매한가지다. 감나무가 성성하여 감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후손을 위한 몸부림이다. 구한말 혼돈의 시대,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여 한 치 앞도 보지 못할 시기였다.

“어머니께서는 아내의 나이가 비녀를 꽂기도 전이라 차마 집안일로 고생시키지 못하시고, 친정에 가 지내게 하셨다..… 열여섯 살이 되자 비로소 진천의 시골집으로 왔다.”

너무 이른 혼인이라 혼인은 하였는데 여자로서 성숙할 시기를 기다렸다가 부부로서 첫 연을 맺으려면 3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 한다. 글쎄, 글쓴이의 아내는 참판을 지낸 성건호의 딸이라 양반집 가문이기에 3년을 친정에서 보냈지만, 일반 평민이라면 고된 가사노동을 하였다. 남자는 할일이 없어도 집안일, 밭일을 해서는 안되는 시대였다.

“가을 겨울날 밤에 아내는 자줏빛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입고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앉아 있다가, 내가 밖에서 들어오면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아내가 자기 방으로 물러가느라 마루에서 내려와 급히 치마를 끌고 가서 문을 꽝 닫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음이 항상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서정적인 표현이다. 부부지간이지만, 서로의 애정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기이기에 아내는 남편의 그리움을 ‘꽝’ 닫는 문 소리로 표현하고, 남편을 그것을 알아차리니 더 섭섭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여자이고 아내인데, 아내가 먼저 살갑게 다가와야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것이 시대의 풍속이 아니던가?

“진천에서 삼 년을 살다가 나는 아내와 함께 한양으로 왔다. 이듬해 어머니께서도 따라오셔서, 한양 서쪽 서강(西江)에서 살았다. 어머니와 아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방에서 지냈는데 이 시절에 어머니께서는 가장 즐거워하셨다.”

이런 장면은 옛날 TV 드라마의 한 장면 아닌가? 지금처럼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신혼 살이 아들을 훼방하는 시어머니, 그런 시어머니와 아들 간의 갈등이 단골 주제였다. ‘어머니와 아들, 시어머니와 며느리’ 참으로 간드러진 표현이다. 효와 사랑은 양립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가난이 문제다.

“나는 먼 곳으로 떠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은근히 말렸다. 나는 아내가 매우 현명하여 내가 멀리 떠나 있더라도 집안 걱정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월 스무사흗날은 아내의 생일날이다.”

글쓴이는 중국 상해로 망명가 있는 창강 김택영을 만나보려 계획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생일이 음력 2월 23일이나 초봄이다. 아내는 자기 생일까지만 있어 달라고 하지만, 글쓴이는 매정하게 아내의 생일 2~3일 전에 훌쩍 떠난다. 그때 글쓴이의 나이는 21살이고 아내의 나이도 21살이다. 이렇게 젊은데, 잠시의 이별이 무슨 슬픔이냐며 훌쩍 떠나는 남편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내의 예감이 교차한다. 늘 예감이라면 여자의 감응이 맞다.

“내가 떠날 때 아내는 어머니를 따라 중문(中門)까지만 나왔으니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아내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장소가 중문이다. 대문도 아니요, 동구 밖도 아니요. 항구는 더구나 아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이별 방식이며 이별 장소다. 그렇게 먼 발 눈빛만으로 서로를 떠나보내고,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가난한 나라의 젊은 청춘의 사랑은 가난만큼 슬프고 아프다.

필자는 늘 “정신만 올바르면 정신만 살아 있다면…” 하고 외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 아프다. 이용후생(利用厚生) 하지 않는 정신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말만 하면 정의요, 공정이요 하지만 얼마나 허무한가?

“몸도 약한 사람이 오래도록 객지에 나가 있으니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요? 오로지 무탈하고 잘 지내기만 기원할 뿐이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예요.”

남편을 보내고 나서 때때로 먼 곳을 바라보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아내, 이를 먼발치로 바라보는 친정엄마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남편이 그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약한 남편이 걱정되어서 운다고 한다.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 중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묻어두어야 했을까? 아내는 그것이 여자의 일생이라고 여겼을까?

“아내는 마음속으로 팔월 달 아버님의 기일에는 내가 꼭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여 내 옷을 지었다. 배가 불러 몸을 바닥으로 구부릴 수 없게 되자 옷감을 배 위에 올려놓고 가위질과 바느질을 번갈아 하면서 몸이 고단한 줄도 몰랐다.”

아내는 글쓴이가 아버지 제사에는 꼭 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삭인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느질을 계속한다. 글쓴이는 아버지 제사에 오지 못했다.

1913년 상해는 아내의 그리움보다 더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해에는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찾았으며, 창강 김택영(金澤榮, 1850~1927년)도 있었다. 벽초 홍명희, 호암 문일평 등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에 불 타던 시절이었다.

나라의 긴박함과 바느질의 느림이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식민지의 젊은 지식인과 고국에서 이를 기다리는 아내, 기다림의 최종승자는 누구인가? 기다리는 사람인가? 기다리는 대상인가?

산문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마치 화석처럼 식민지에 막 접어든 가난한 나라의 젊은 지식인의 몸부림 속에 지극한 순정을 품은 아내의 보일 듯 말 듯 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 첫사랑은 어떤 풍경으로 다가올까? 7080 낭만 가득한 종로서적 앞의 기다림을 요즈음 젊은이들은 상상할 수 있을까?

위당 정인보

*참고 및 인용: 안대회, 이현일 편역 <한국 산문서9> 정인보 ‘서사(抒思)’ pp.35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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