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 칼럼] 한·중·일 근대화운동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딜레마

“나는 동아시아 3국이 벌인 인간개조운동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새마을운동’만이 창조적 파괴를 하여 성공하였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국뽕은 절대 아니다. 정부가 주도했지만, 자발성이 강했고 일부 계층만 특혜를 본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특혜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한국의 새마을운동 한 사례

자기를 파괴하고 살아남은 것은?

동아시아 3국인 일본, 중국, 한국은 스스로 근대화를 하지 못했다. 마주한 서구의 거대한 압도적 차별에 몸서리 치면서 저항과 반항, 거부와 수용을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부정의 딜레마에서 헤어날 수는 없었다.

1868년 일본은 두 종류의 혁명을 준비한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난 제도를 서구로 바꾸는 메이지유신이고, 다른 하나는 속으로 감추어진 정신을 개조하는 독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나 국가나 상대의 엄청난 차별을 감지하면, 우선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였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지울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지우고, 부정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생겨 오랫동안 소중하게 생각했던 전통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일본 종교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다. 불교 속에 신도(神道)가 있고, 신도 속에 불교가 있어 절이든 신사든 차이를 못 느끼며 1천년을 살아왔다.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선포한다. 이를 통해 신도와 불교를 분리했고, 그 자리에 천황교(天皇敎)라는 국가 종교를 세울 요량이었다. ‘천황만이 유일한 일본의 상징’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위해 절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혁명의 딜레마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한다. 수많은 군중이 혁명의 가치를 외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중은 처음 의도된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소용돌이 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한다.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고, 새로운 계급은 또 새로운 계급에 의해 파괴된다. 무질서와 혼돈,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국가는 국가가 보유한 마지막 권력인 군대를 통해서 질서를 회복한다.”

전국에 있는 목탑은 불태워지고, 청동 불상은 녹여지며, 불경은 불쏘시개로 팔려나갔다. 도쿄대학 교수로 초빙되어온 페놀로사는 “불상을 빠개서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경을 찢어 가게의 포장지로 쓰는 것을 보며 자신들의 전통을 저렇게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면서 통탄하지만, 혁명의 불길은 그렇게 쉽게 꺼지지 않았다.

1962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역대 최대 규모인 약 7000명의 당 간부가 모여 대약진운동의 과실이 주석에 있다는 듯 의심의 발언을 시작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말을 끊고 “지역마다 모두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성공과 실패가 7대3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반격했다. 그러자 린뱌오(林彪)는 “마오 주석의 생각은 늘 옳다…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법이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당의 역사를 돌아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고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업적이라고 마오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진실은 마오의 업적과 전혀 달랐다.

“어떤 사람은 연못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고 어떤 사람은 오줌을 뒤집어쓰거나 강제로 배설물을 먹어야 했다. 팔이나 다리를 잃고 불구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왕 쯔유라는 남성은 감자 한 알을 파내 훔친 벌로 한쪽 귀가 잘리고, 두 다리를 철사로 결박당하고, 등에 10kg짜리 돌을 떨어뜨리는 고문을 당한 뒤 마지막에는 몸에 낙인까지 찍었다. 생매장도 행해졌다.”

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말처럼 “스탈린의 잔인성은 마치 오소리 덫처럼 기계적으로 작동”했다면, 마오쩌둥은 “변덕스럽게도 자신의 주도적 지위를 유지하려 일부러 사회를 뒤집어 엎고 수많은 계층이 다른 계층에게 폭력을 가하도록 부추겼으며, 기가 막히게 자신으로 향한 화살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차도살인(借刀殺人)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문화대혁명의 실책을 꼬집었다.

1970년, 대한민국은 새마을운동으로 오천년 동안 지속된 초가집이 사라지고 슬레이트집과 기와집이 들어서고, 지게만 겨우 비켜 갈 정도의 동네 오솔길이 리어카가 다니는 큰길로 바뀌고, 계단식 천수답에 블도저가 들어와 농지정리를 시작했으며, 동네와 동네를 잇는 길에 신작로가 들어섰다. 더불어 동네 어귀에 있던 서낭당과 무당이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사라졌다.

인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농토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싸움박질에 화투로 평생을 보냈던 남정네들이 ‘4H’라는 이름으로 훈육되기 시작되었다. 오천년 동안 지속된 ‘농자지천하대본’만으로는 마주한 거대한 서구를 이길 수 없기에 정신 개조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동아시아 3국이 벌인 인간개조운동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새마을운동’만이 창조적 파괴를 하여 성공하였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국뽕은 절대 아니다. 정부가 주도했지만, 자발성이 강했고 일부 계층만 특혜를 본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특혜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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