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차마고도③] 중도객잔,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에 넋 놓고

차마고도 <사진 윤일원>

한 가운데 ‘상사니양대'(爽死??台, 쐉스니양타이로 발음)를 세로로 쓰고, 우측에 동경 100° 8′ 4”, 좌측에 북위 27° 14′ 25”, 맨 아래 해발 2,345미터라고 적혀 있는 곳, 이곳이 중도객잔(中途客棧, Halfway Guesthouse)이다.

물은 맑아도, 진흙탕이어도 아래로 아래로 쉼없이 흐른다.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사진 윤일원>

중도객잔의 전망대에 서 있으면 손에 잡힐 듯 앞에는 5,596m 옥룡설산이 마주하고, 뒤에는 5,396m 하바설산이 자리한다. 발 아래 V자 협곡에는 진사강이 진흙탕물이 되어 흐른다.

부슬비가 내리는 객잔에 어둠이 몰려오니 한 잔의 술이 없어도 곤히 잠들었지만, 선선하고 맑은 공기로 잠에서 깨어나 보니 새벽 3시15분이다. 객잔 밖에는 여전히 보슬비가 내린다. 해발 2,345미터에서 맞는 여명은 어떨까? 늘상 해발 338미터의 인왕산 여명만 바라본 나로서는 설산에서 맞이하는 여명을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필자의 룸메이트 정왕부 박사 <사진 윤일원>

룸메이트인 정왕부 박사도 부스스 덩달아 일어나니, 이 어찌 여행의 기쁨이 배가 되지 않겠는가?

본능적으로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어제 저녁 엘 콘도르 파사를 연주했던 중도객잔의 전망대에 올랐다. 깜깜하다. 완벽한 어둠인 태고의 검은색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색은 흰색과 검은색이라고 하였으나, 이에 동조하지 않은 아이작 뉴턴이 프리즘을 갖다 대자 빛은 ‘빨주노초파남보’로 바뀌었고, 그 어디에도 흰색과 검은색은 없었다.

흰색과 검은색은 빛깔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 논쟁에 뛰어들어 “검정은 색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 이유로는 검은색을 만드는 안료의 값이 매우 비쌌을 뿐더러, 공기 중으로 쉽게 휘발되는 성질 때문이다.

필자의 뒷모습을 누군가의 솜씨로…

늘 분석적이고 검증할 수 있는 논리를 자신의 철학으로 삼는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을 하나로 뭉치는 흰색과 모든 것을 하나로 흡수하는 검은 색, 이 두 색깔에 대한 논쟁을 끝도 없이 이어 양자역학까지 발전한다.

하지만, 동양은 단 한 글자 검을 ‘현'(玄, 검다. 아득하다. 멀다, 현묘하다. 어스름하다. 신비하다)만을 사용하여, 끝내는 후학들이 여전히 이 한자를 두고 끝도 없는 논쟁을 이어간다.

<노자> 1장에 ‘현지우현(玄之又玄), 중묘지문(衆妙之門)’, “아득하고 아득하니 묘함이 가득한 문이다”라고 하며, 6장에 ‘곡신불사(谷神不死), 시위현빈(是謂玄牝)’, “계곡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로 하며, <천자문>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연인일까, 아니면 이미 한가족? <사진 윤일원>

중도객잔의 여명은 완벽한 검은색에서 서서히 블루칼라로 바뀌는 중이었다. 해뜨기 30분 전 잠시 잠깐 블루칼라인 하늘이 흰색으로 바뀌어 일출을 맞이한다. 난 전생의 이순신 장군처럼 날마다 하늘의 일기(日氣)를 인왕산으로 관찰하여 알지만, 룸메이트인 정박사도 공대생답게 이 빛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언빌리버블!

우리 둘은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삐걱거리는 나무집 3층에서 전망대까지 들락날락하면서 장엄한 옥룡설산이 연출하는 거대한 무대에서 둘만이 관객이 되어 쉴 새 없이 변하는 운해에 넋이 빠져 있었다.

이 집은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을까? 용마루 밑 개(?)자 모양의 나무 문양과 그 오른쪽 둘둘 말아놓은 멍석 서너개가 보인다. <사진 윤일원>

이제 우리 일행은 ‘빵차’ 6대에 나뉘어 타고 호도협(虎跳?)으로 내려갈 차례다. 진사강, 중도객잔 전망대에 한 발짝 뛰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강을 구불텅구불텅 아슬아슬한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니 강폭이 불과 10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협곡에서 정상까지 무려 표고 3,900미터, 이 수치의 깊이와 폭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엄청난 흙탕물 소용돌이도 좋은 구경거리다. <사진 윤일원>

거대한 V자 협곡 폭이 너무 좁아 호랑이가 폴짝 뛰어 건넜다는 전설이 있는 곳, 간밤에 내린 비로 엄청난 흙탕물이 지하의 마그마가 지상으로 폭발하듯, 원자탄이 발 아래에서 터지듯하다. 솟아 뛰어오르는 놈, 부딪혀 사라지는 놈, 꿈틀거리면서 용쓰는 놈, 제 몸이 부서져 하얀빛을 쏟아 내는 놈, 고꾸라져 깊은 물속으로 잠기는 놈, 옆으로 날아 다시 위로 솟구치는 놈, 하얀 분말이 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놈, 그놈들을 다 헤아리려고 애를 썼지만 헤아릴 수가 없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노자>를 모르는 사람도 이 사자성어는 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기꺼이 도우면서도 스스로 낮은 곳에 머무니,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선(善)의 모습과 같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고? 맞다. 물이 없으면 뭇 생명은 죽는다. 동물은 걸어 다니는 물주머니요. 나무는 서 있는 물주머니다. 물이 낮은 곳에 머물러 선하다고? 맞다. 물은 선하게도 낮은 곳으로 흘러 우리가 이용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

아마, 노자가 용암이 끓는 듯한 물을, 천군만마가 달려드는 듯한 물을 이곳 호도협에서 보고 <노자>를 지었다면 ‘상선은 약수(若水)’라는 메타포 대신에 다른 물체를 사용했을 것이다. 물이 다투지 않아서 바위를 뚫고, 물이 다투지 않아서 산허리를 가르는가? 아니다. 다툼이 극에 달해서 그렇다. 무릇 극에 달한 놈은 다시 순둥순둥 제자리로 돌아오는 반본환원(返本還源)의 이치를 따른다.

필자 뒤로 운해가 피어오른다. 

*4부 차마고도, ‘여강고도는 있을 것은 다 있는데 단 하나만 없구나’로 이어짐. 사진은 중도객잔 여명과 호도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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