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시선] 삼성 이병철 창업주가 현장공장에서 살렸던 세가지
이미 작고하신 작은 아버님의 말씀에는 가끔 통찰력이 있다. 대표적 말이 “저놈이 농사짓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우스에 가보면 안다”는 말이다.
비닐하우스는 주변보다 온도가 높아 풀이 잘 자란다. 그 잡풀을 제거할 만큼 많이 와서 보고 온도를 맞추어야 고추 몇 박스라도 더 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가 두루뭉술하면 백성은 순박하고, 정치가 꼼꼼하면 백성은 이지러진다.”(노자 58장)
얼핏 보면 상식을 뒤엎는 이 선언, 이 가설의 진위를 설명할 수 있을까?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현지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세 가지를 꼼꼼히 살펴봤다고 한다. 공장의 청결도와 공장에 있는 나무, 기숙사의 정리 정돈이다. 이것만 보면 공장의 경영지표를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점점 정치에 목매는 사회로 변했다. 왜냐고? 정치가 국민의 밥줄을 쥐고 있어서 그렇다.
대부분 두 가지 경우인데, 하나는 무엇을 하고자 하면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관을 움직일 수 없으니 관의 대척점에 있는 정치가를 동원하여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금으로 부의 분배를 너무 많이 하여 가만히 있다가는 내 재산이 거덜 날 수도 있고 잘하면 한평생 놀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의 가장 큰 것은 혁신 기술이 나타났을 때 그 시장 가치를 몰라 규제나 기득권으로 틀어막는 경우이고 작은 것은 시장의 수요가 잘잘못을 판단해도 될 일을 구태여 정부가 자격증을 주어 상업 활동을 제한시키는 행위다.
두 번째 문제의 가장 큰 것은 만연된 포퓰리즘으로 혁신 활동을 제한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또 집단으로 정치권과 결탁하여 평생 먹고사는 유한(有閑) 계층을 만드니 이는 국가 쇠락의 주요 원인이 된다.
우리의 삶이 정치와 맞닿아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듯, 사람의 길흉화복 또한 도(道)와 맞닿아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선천적 인지력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인간은 “큰 돌에 넘어지지 않고 잔돌에 넘어지는” 자기 꾀를 극복하지 않으면 자기모순에 빠져 길흉화복의 장애를 극복할 수 없다.
“화에는 복이 기대어 있고, 복에는 화가 잠재되어 있으니, 인과의 꼭지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고 느긋이 그것을 즐겨라.”
정말 도사다운 말씀이다. 이거야말로 두루뭉술 인생관의 극치가 아닌가? 행위는 그렇다고 하여도 논리는 정교해야 한다.
바로 <노자>가 제시한 ‘기무정론(其無正論)’이다. 바름(正)은 아예 없다. 바름은 인간 본성에 기인한 품성이 아니라 어울려 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논리이니 이 또한 실체가 없도다. 그러니 바름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음을 깨달아라.
내 어찌 아느냐고. 바름이 기괴함으로 되돌아오고(正復爲奇), 착함이 요사함으로 되돌아오지(善復爲妖) 않느냐? 이 모순의 순행을 가만히 살펴보면 바르다고 여긴 것이 늘 바르지 않다.
그러니 “네모나다고 자르지 않고, 청렴하다고 해코지 않고, 곧다고 찌르지 않고, 빛난다고 눈부시지 않다.”
알겠는가? 늦겨울에 매화를 재촉하는 이른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도다.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