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의 소프트파워] 러시아 아가씨와 ‘모피로드’
모스크바에서 여행 온 아가씨들, 서울에서 신이 났다. 그 중 아나스타샤 나스짜가 한국어를 잘 해 놀랐다. 그러면 그렇지, 수도에서 한국어 교사로 지내며 가끔 지인들 데리고 한국에 온단다. 나와 연락처를 주고 받을 때 깜짝 놀랐다. 외국인들은 카톡을 잘 모르니 와츠앱이나 이모(imo), 바이버(네팔 등 서남아시아) 위챗(중국), 텔레그램 등 다양한 걸 쓴다. 한국처럼 자체 앱이 없는 나라가 많다.
외국인이 카톡을 사용하는 경우는 한국에 온 유학생들이거나 한국과 사업을 하는 이들이다. 요즘은 한류열풍으로 카톡을 쓰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카톡은 지구촌과 연결되는 또다른 세상이다. 러시아에서 온 나스짜는 오늘(24일) 모스크바로 돌아간단다. 이 시절에 한국여행을 온 걸 보면 아직 여행 고수는 아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에 여행 오려면 10월이 가장 적합하다.
엊그제 프랑스 여행객이 오이도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녀들도 평소 같으면 러시아 상공을 날아서 한국에 왔을 것이다. 두 여성 중 한 명은 얼굴이 아랍계 후손이었다. 한국에서도 프랑스로 직접 가려면 러시아 상공을 날아야 한다. 땅길, 바닷길, 하늘길 모두 인간에게는 세상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새로 길을 내는 일이 곧 인류의 역사였다. 실크로드나 해상무역로 그리고 모피로드까지 그 길을 따라서 인류 역사가 이어졌다. 길을 잃기도 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다. 언젠가 영국 BBC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러시아가 지구의 땅 면적 중 12%나 차지하고 있다. 그리 광대한 나라가 되었던 이유를 추적해 가는 프로그램이었다. 놀랍게도 ‘검은 담비’ 등의 모피 때문이었다.
고려대학교 윤성학 교수가 낸 책 <모피로드>, 부제가 ‘유라시아의 가장 북쪽길’이다. 이 책은 러시아가 한반도와 국경을 마주하는 계기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독자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안긴다. 길이라는 글자를 듣기만 해도 설렌다. 언제든 어디로든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또다른 길이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다. 꽉 막힌 골방에 있을지라도 열린 세상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한 건 마음길 덕분이다.
역사는 무수한 길을 따라 발전해 왔다. ‘차마고도’만 봐도 인간에게 길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바닷길이나 하늘길을 따라 수만 리 머나먼 나라를 수시로 오간다.
그러나 마음길이 닫힌 사람과는 한 자리에 있어도 남남이다. 보이는 길보다 보이지 않는 길로 인해 인생이 바뀌는 게 세상사이다.
윤성학 교수는 러시아와 CIS 전문가이다. 나의 경우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왔다. 기타 중앙아시아 5개국 나라별 지인들이 있다. 그의 책이 내게 주는 독서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아마도 CIS 요리를 다 좋아할 듯하다. 동대문에 중앙아시아 아지트가 있다.
언젠가는 윤 교수와 함께 중앙아시아 음식을 먹으며 모피로드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중앙아시아 중 우즈베키스탄의 요리인 라그만, 옷시, 샤슬릭, 솜사 모두 좋아하지 않을까? 카자흐스탄에서 먹어본 싹사울나무 뿌리로 구운 양갈비를 대접하고 싶다. 좋은 글을 쓰고 책을 낸 고마움 덕분이다.
한국에는 싹사울나무가 없으니 아쉽다. 천산산맥이 보이는 알마티에서 특별한 양갈비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황홀한 맛이 평생 추억이 되었다. 참나무 향을 떠올리게 하며 오묘한 맛도 내는 싹사울나무, 그 뿌리로 구운 양갈비나 샤슬릭을 대접할 수 없으니 대신 러시아산 보드카를 한 병 준비할까? 혹시 술을 못 마시면 우즈베키스탄 체리로 만든 순수 100% 체리 주스도 좋겠다. 러시아의 푸틴은 우즈베키스탄 국가와 그 나라 과일주스를 좋아한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 갔을 때 본 유라시아, 너무도 아름다웠다. 중앙아시아 5개 국가 사람들이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아서 혹시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했다. 전혀 그게 아니었다. 마치 그 나라들이 러시아를 큰형님처럼 여겼다. 한국처럼 식민지배 같은 지난 역사를 가지고 처절하게 물고뜯는 나라가 지구상에 많지 않다. 물론 가해국인 일본의 자세도 독일과 달라서 문제가 있긴 하다.
요즘 매스컴에 나오는 실시간 전쟁 뉴스가 지구촌을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실제 러시아는 너무도 다르다. 비록 전선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러시아 내부에서는 비즈니스가 더 잘 되고 화장품도 더 팔린다. 국토가 워낙 광대한 나라여서 일부 지역에서는 전쟁 느낌이 없단다. 심지어 어느 외진 지역에서는 전쟁이 난 걸 모르는 이들도 있다니… 6.25남침 전쟁 때도 전라도 섬이나 경상도 산간마을에서는 전쟁을 몰랐듯이 말이다.
전쟁터 한쪽에서는 러시아 군인들과 용병이 죽어가고 또다른 곳에서는 해외 여행을 즐긴다. 그 사이 러시아 관련 각 나라 사업가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비즈니스를 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화장품도 폭발적으로 더 잘 팔린다. 러시아 사마라주의 고위직 공무원 부부도 스키 여행을 다녀왔다며 내게 사진을 보내왔다. 부유층의 전형적인 옷차림이었다. 인류사의 씻을 수 없는 상처, 2차세계대전 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한쪽에서는 와인 파티를 즐기고 클래식 공연도 했다.
인간 세상이 이러하다. 같은 시대 21세에 태어나도 국적이 어디냐에 따라 또는 사는 지역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전쟁이란 다수에게 길을 막고 인생의 길도 잃게 한다. 이미 전쟁은 벌어져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는 길이 없다. 그래도 새로이 길을 찾거나 만들며 21세기를 통과해야 한다.
운명처럼 한국이 큰 역할을 하리라. 시대에 따라 실크로드나 모피로드 역시 다 저문다. 새로운 길이 열리듯전쟁 난민들에게도 한국 여행을 올 만큼 새 삶이 시작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