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의 소프트파워] 싱가포르 노인들이 고구마 질색하는 까닭
60대 이후 대한민국 어르신들 중 고구마와 보리밥를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 가난하던 시절 구황식품으로 먹었던 음식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다. 지금이야 싱가포르가 국가경쟁력 세계 2위이지만, 그들도 빈곤한 시절을 거쳤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에서도 어머니들은 ‘자식 굶기지 않는 게 지상과제’였다.
80대 후반인 베티의 어머니는 젊은날 영국인이 주로 이용하는 고급 레스토랑 종업원이었다. 하도 먹을 게 없어 주방에서 양배추 겉잎 버린 걸 주인 모르게 모았다. 퇴근 때마다 쓰레기통에서 그걸 집으로 가져다가 먹고 살았다. 파 한 뿌리나 계란 한 개도 다 수입해서 살아가는 나라, 도시국가에서 가난하다는 의미는 곧 죽음을 뜻한다. 초근목피도 한국처럼 땅이든 산이든 있어야 가능하다. 산도 없어서 ‘부키티마 힐’이 전부인 나라가 아닌가? 그들은 산이라고 주장하나 우리 눈에는 뒷동산에 불과하다.
리콴유 총리가 등장하기 이전 싱가포르 섬은 처절했다. 1965년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골치 아픈 섬이라면서 버렸다. 일반 주민들에게 고기는 언감생심이었다. “영국 손님들이 칼질만 하고 남긴 식탁의 고기를 모아다가 집에서 온가족이 먹었다”며 베티의 어머니가 내게 옛시절을 들려주셨다. 그 어른은 살아생전 고구마를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3년 동안 지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때 늘상 배를 곯으며 겨우겨우 고구마만 삼켰다”는 게 아닌가?
젊은 세대에게는 간식이나 별식인 고구마가 지구촌 노인들에게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연상시킨다. 상처의 먹거리였으니 전쟁의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2차 세계대전 등 전쟁통에 고구마로 연명했던 이들은 국적 불문하고 고구마를 싫어한다.
오드리 헵번은 전쟁 중에 겪은 굶주림의 트라우마로 늘 핸드백에 초콜릿을 넣고 다녔다. 먹지 않더라도 자기 가방에 먹을 게 없으면 불안증에 시달렸다.
1960년대 중반 태어난 나는 밥을 굶지 않아봐서 그런지 고구마도 좋아한다. 가난이 개인의 운명인지 사회적 책임인지 모호할 때가 있다. 시대 탓이 가장 크지 않을까? 어느 나라든지 가난할수록 극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인고의 세월이 길다. 적어도 최소 수년이나 수십년간 고생한다. 계곡이 깊을수록 냇물도 깊게 흐르듯 그 지난한 세월 후에 성공하는 이들은 아픈 과거사를 웃으며 들려준다.
베티 가족들은 매우 멋진 사람들이었다. 과거의 빈곤을 벗어나 수영장이 3개 딸린 도버로드 헤리티지뷰의 콘도미니엄(고급 아파트)에서 살면서도 늘 겸손했다. 나에게서 한국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친한파가 된 그들은 코로나 전 한국에 여행 왔었다. 베티의 친정 어머니와 딸, 세 여인이 마포 가든호텔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가든시티’라는 별명을 지닌 나라 사람들이 서울에 와 가든호텔에서 지냈다.
베티는 자신의 어머니가 먹을 것도 없이 가난하던 시절, 자녀 교육을 위해 희생했기에 지극 정성으로 잘 모셨다. 보기 드문 효녀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식당 허드렛일을 하는 종업원으로 살면서도 딸에게 미국 유학을 시켰다. 그녀는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소원을 듣고, 효도여행을 시켜드리려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신기하게도 가난하게 성장한 사람들일수록 효자가 많다. 풍요롭게 큰 이들 중에 불효자가 흔하다. 그것은 지구촌의 공통적인 현상인 듯하다.
연세가 80대 후반이었고 노환에 시달렸던 베티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대한민국 여행이었다. “언제 봐도 미소를 짓고 상냥한 한국인, 체리가 사는 나라에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셨단다. 한류 열풍으로 TV에서나 보던 나라, 사계절이 있고 겨울에 눈도 내린다는 신비로운 대한민국으로 마침내 여행을 오셨다.
서울 관광지 중 어른이 편안히 보실 수 있는 곳만 골랐다. 한강에 가서 페리 유람선도 태워드렸다. 싱가포르가 섬나라이고 또 바다 구경은 무한대이지만, 한강 감상은 또다른 풍경이라서 무척 좋아하셨다. 여러 군데를 구경시켜 드리고 한식도 대접해 드렸다. 잡채와 불고기를 좋아하신 분이었다. 내가 그 나라에 살 때 지구촌 다양한 외국인들에게 한식의 매력을 알도록 노력했었다. 서로 초대를 했고 초대도 받았다.
싱가포르에 사는 동안 촌음을 아껴서 집이나 수영장 파티장에 다국적 사람들을 초대했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저녁 파티를 마치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수십 개의 접시를 닦고나면 다음날 새벽 4시가 되기도 했다. 그런 날은 24시간 내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웅담찌개나 산삼 깍두기를 먹는 것이냐? 어떻게 그리 에너지가 넘치느냐?”며 신기해 했다.
외국인들이 한식을 난생 처음 먹으니까 나로서는 기뻤다. 그들에게 얼마나 남다르고 일평생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을 일인가? 정성껏 음식을 만들었다. 지금은 살림을 하지 않으니 라면도 못 끓이겠다. 그 시절 장보기를 하다 보면 국적이 별의별 나라가 다 있었다. 매일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어오는 트럭과 화물선 행렬, 항공기가 분주히 움직여 수백만명이 먹고 마실 수 있는 나라가 싱가포르이다.
그 가운데 재패니즈 스윗 포테이토(Japanese sweet potato)라는 이름으로 팔리던 고구마도 있다. 국가 지도자를 잘 만나니 배고픔을 겪던 싱가포르 사람들이 이스라엘 단감도 먹는다. 모든 먹거리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들은 매사 풍요롭게 즐기면서 산다. 훌륭한 지도자를 가진 축복, 국민의 행복이다. 주변 국가들이 다 부러워 한다.
베티 가족과 서울에서 여행하며 젊은 시절 싱가포르에서의 행복한 추억도 나눴다. 젊은 날 영국인 식당에서 일을 하신 분이라 베티의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으셨다. 나를 초대할 때 치킨라이스와 우롱티를 꼭 준비하셨다. 디저트로 망고젤리도 손수 만들어 주셨던 분이다. 서울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이 스마트폰에서 어느날 다 날아가서 안타깝다. 인생이란 지나고 보면 세월과 더불어 다 흩어지는 허상과 같다.
베티의 어머니는 한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신 뒤 6개월도 안 돼 소천하셨다. 가난을 희망의 징검다리로 여긴 국내외 어르신들은 대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새끼들이 굶고 있으면 절대로 가만히 앉아 죽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 간혹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방치하는 뉴스를 듣는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이런 사회상에 엄청 충격을 받는다. 지구촌에서 한국어를 잘 알아듣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게 나는 우려스럽기도 하다.
참고로,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역사적 기록에 정확히 남아있다. 1763년 영조의 명으로 일본 통신사 정사로 다녀온 문익공(文翼公) 조엄(趙?)이라는 분이 주인공이다.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우연히 보고 백성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했다. 부산(동래)과 제주도에서 재배하여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영조 때 암행어사와 동래부사(지금의 부산시장), 경상도 관찰사,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낸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日記)는 지금도 서점에 가면 살 수 있다. 5백명이 넘는 통신사 구성원들과 바다를 건너며 꼼꼼하고 방대하게 기록을 남겼다. 세계 해양문화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해사의 사(?)는 뗏목 사로, 해사는 바다에 띄우는 뗏목이라는 뜻이다. 일독을 권한다. 강원도 원주에 가면 ‘조엄기념관’이 있다.
요즘 고구마가 자주 눈에 띈다.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다이어트 식품이다. 해남의 고구마빵 ‘피낭시에’도 인기다. 지구촌 식량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러면 다시 고구마가 구황작물이 될 듯하다. 오늘날에도 아직 고구마가 없는 나라가 많다. 고구마를 전혀 모르는 문화권 사람들이 식량 위기로 결국 고구마를 알게 될 것만 같다. 지구 기후변화와 전쟁 뉴스를 들을 때마다 고구마가 떠오른다.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