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의 소프트파워] 한국서 아들 뇌전증 수술, 이라크 장군의 선물
고려대에 유학 온 이라크 학생, ‘아담’을 만났다. 아담은 여름방학을 맞아 바그다드에 다녀왔다. 그는 내 이라크 친구 000장군 부부가 보낸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정성껏 포장 해서 보낸 그 마음이 느껴졌다.
“체리 선생님은 우리의 추억과 가슴에 영원히 함께 한다”는 문자도 보내왔다. 어느 외국 친구들보다 특별한 사연이 있다.
부모에게 자녀가 건강하지 못하면 어느 자녀 가릴 것 없이 아픈 손가락이다. 이라크 장군의 자녀 중 함모디(예명)는 5남매의 막내다. 생후 6개월부터 시작된 함모디의 뇌전증 때문에 가족들은 그동안 안 해 본 게 없었다고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주술사에게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병원비와 약값 등으로 18년간 집 몇 채 값이 들어갔다. 바그다드에 있는 병원은 물론 이집트 카이로에까지 가서 치료를 시도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아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린 세월이 길고도 길었다.
함모디는 자신의 병이 남에게 알려질까봐 가족들 외에는 말을 잘 하지 않는 내성적인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대인관계에도 많은 제약을 받았고 미래의 꿈도 없었다. 공부까지 싫어했다. 함모디의 부모님은 이 아들에게 모든 욕심을 비우고 기도하듯 살아왔다. 부디 발작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게 없었다. 함모디가 그들 삶의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그 또래 청소년들은 이성에도 관심을 갖기 마련인데 함모디는 엄마밖에 모르는 마마보이였다. 유일한 관심사라고는 자동차 뿐이었다. 한국과 달리 일찍 운전면허증을 따고 차를 몰 수 있는 나라 이라크, 차에 호기심 넘치는 청소년이다 보니 아버지나 형의 승용차를 몰고 친구들과 몰래 놀러나가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순식간에 발작을 일으키는 뇌전증 환자에게 운전은 거의 자살행위다. 의사나 부모님이 모두 만류하였다. 그러나 청소년 특유의 반발심과 호기심 때문에 차를 몰고 나가기도 했다. 어느 때는 발작을 일으켜 남의 눈에 띄어 집으로 연락이 오거나 다치기도 했다.
10대 후반의 함모디는 뇌전증 발작을 줄여주는 약도 거부했다. 부모님 눈을 피해 쓰레기통에 버리기 일쑤였다. 평소에는 자신이 멀쩡하니까 약의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또 그런 약을 먹는다는 사실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그 때문에 약을 걸러서 내성이 생기기도 했다.
병이 낫지 않는 한 누군가의 관심과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함모디 부모님은 그를 빨리 결혼시킬 계획도 세워놓았다. 그들은 여전히 사촌간의 결혼이 가능하고 결혼도 일찍 하며 중매가 일반적이다. 부모가 배우자를 선택해 주는 문화인데 마침 함모디 어머니의 자매에게 18세 동갑내기 고운 딸이 있었다.
함모디의 부모님은 아들을 결혼시켜 자신의 집 3층에 평생 숙식도 제공하면서 함께 살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자나깨나 아들 때문에 상심했던 그들은 한국에 국방부 연수를 와서 수준 높은 한국의 기술이나 의술 앞에 감동했다. 우연히 한국인 친구인 내게 막내 아들이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됐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두 나라가 합심해서 수술할 기회를 만들었다.
함모디가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수십 명이 여러 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래가 구만 리 같은 그의 건강한 삶을 위해 모두가 정성을 다했다. 한국 정부, 교회 관계자, 기업 CEO, 이라크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 양국 대사관, 병원 의료진, 사회 친구들 그리고 이집트 출신 아흐멧 박사 등 수많은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삼성병원과 최고의 의료진이 합심해서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수술을 하루 남겨두고 함모디는 갑자기 수술을 받지 않겠다며 가족 모두 병원을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는 진행 상황이 궁금해 안부차 전화를 걸었다가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당장 달려가 사태를 파악했다.
넋을 잃고 있는 함모디의 부모님에게 함모디를 데리고 무조건 병원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했다. 일단 그들의 입장을 들어주며 안심을 시키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함모디의 부모님은 물론 수술을 받기 위해 한국에까지 혼자 비행기를 갈아타고 왔던 함모디도 망연자실한 표정만 지었다. 수술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그냥 바그다드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해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수십 명이 노력한 게 허사가 될 뻔했다.
수술 전날 한국 의료진과 함모디 부모님과 회의를 했다. 그날 영어, 아랍어, 한국어가 서로 잘 소통이 되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3개 언어가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의료진은 한국어와 영어를, 함모디 부모님은 아랍어와 불완전한 영어를, 한국인 친구들은 한국어와 불완전한 영어로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회의를 했으니 환자 입장에서 전문용어 등을 알지 못했다. 의료관광 케이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그 자리에 한국인과 결혼해서 한국어를 남들보다는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집트 출신 수의학 박사가 통역을 돕겠다고 나왔다. 하지만 전문 의료용어뿐만 아니라 인간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나 대화 중간중간 행간의 의미를 충분히 읽어낼 수는 없었다.
이라크는 비영어권이라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영어가 불완전하다.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으며 미국한테 무기 사찰 등 이들 두 영어권 국가와 적대적이었다. 미국이 쓰는 영어 공부를 소홀히 했다. 그런 만큼 미국 유학파 출신 의료진이나 문법적으로 영어를 잘 하는 한국 의사들은 함모디 아버지의 아랍식 영어나 발음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나처럼 생존 영어를 하는 이들이 그들과 잘 통하는 의외성이 있다.
수술을 하루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병원마다 수술 전 의례적으로 하는 부작용에 관한 설명이 문제였다. 뇌 수술 후유증으로 안면마비가 오거나 식물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또 과도한 뇌출혈로 자칫 사망할 수도 있다는 설명에 그만 새파랗게 질렸던 것이다. 그래서 탈출하듯 집으로 돌아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거였다.
병을 고치려다 자칫 막내 아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들은 밤새 한숨도 못 잤다. 함모디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럴수록 이성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평소 늘 웃던 모습과 달리 나는 일부러 얼어 있는 함모디의 부모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냉정한 표정을 짓고 설득에 들어갔다.
“의료 선진국 한국에서 뇌전증 수술을 받을 기회가 왔다.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다. 천운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겠느냐? 굳이 수술을 하지 않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당장 이라크로 돌아가도 좋다. 하지만 돌아가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 한국인 수십 명이 발벗고 나서서 도와줘 여기까지 왔는데 이 기회를 버린다면 바보다.” 그들은 듣고만 있었다.
“나 같으면 병원에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들을 수술시키겠다. 돈이 문제라면 장기를 팔아서라도 수술을 시킬 것이다.”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서 내 얘기를 주위깊게 들었다. 덧붙여 말을 이어갔다. “한 가지 질문 하겠다. 여기 답변에 따라 함모디의 운명이 달라진다. 지금 당신 손 안에 세계적인 고급 승용차 키와 운전 면허증이 있다.”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자동차를 얻는 것은 자유롭게 되는 걸 뜻한다. 운전을 해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여행을 다니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자동차를 사면서 저 차를 몰면 고속도로에서 대형사고가 발생해 차는 폐차가 되고 한순간에 죽음을 당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하물며 10년쯤 타는 자동차를 사는 것도 그러할진대 앞으로 80년쯤 더 살아갈 아들의 미래를 위한 수술은 이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나는 열변을 토했다.
“쇼윈도우 안에 당신이 원하는 멋진 차가 있다. 들어가서 당장 고급 차 열쇠를 꽂으면 그 순간부터 평생 당신 소유가 된다. 차를 갖겠느냐? 키를 버리겠느냐?”고 물었다. 함모디 아버지는 두뇌가 명석한 분이다. 이라크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아닌가? 순식간에 미소를 지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멋진 차를 갖겠다”고 답했다. 그 의미는 수술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환자 어머니도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함모디도 수술을 받겠다고 대답했다. 안면마비나 식물인간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차라리 지금처럼 평생 살겠다고 말한 함모디도 내가 간절히 설득했다. 함모디의 이라크 친구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갖가지 낭설로 친구를 불안에 떨게 했다. 거기에다가 진행 상황 등을 잘 모르는 함모디 어머니는 오직 기도와 눈물뿐이었으니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자동차광인 함모디에게 “네가 뇌전증 수술을 받으면 평생 자동차를 자유롭게 몰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면 너는 영원히 합법적으로 자동차를 몰 수도 없다. 뛰어난 한국 의료진을 믿고 하늘에 맡겨라” 단호하게 그러나 엄마처럼 진심을 담아 설득하자 함모디도 수술받는 것에 동의했다. 설득이 끝나자 한국 전문의께 “이라크 가족들이 마음을 돌이켜 함모디가 수술을 받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 이튿날 아침 함모디의 뇌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중환자실로 옮겨져 마취에서 깨어날 때 함모디는 엄청나게 고통에 겨워했으나 그 또한 희망이었다. 사람이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도와줬다. 함모디는 기적처럼 중환자실에서 나왔고 웃으며 퇴원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친절과 의료진의 뛰어난 실력을 체험했다. 그 덕분에 함모디는 18년간의 발작을 멈췄다. 함모디가 완치되자 이라크에서 다른 장군들이 뇌전증 수술 문의를 수시로 해왔다. 그러나 비자나 수술 비용이 문제였다. 이런 현실을 알고 나는 국내 유명 뇌 수술 전문 박사와 의논했다. 그 분이 의료봉사를 하시겠다고 약속했다.
이라크 장군의 가족은 한국과 한국인들을 잊지 못한다. 은인의 나라로 기억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전쟁을 겪는 나라에 뇌 관련 질환자가 많다. 산모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의 이라크 친구 장군은 2년간의 한국 정부 연수도 잘 마쳤다. 함모디 수술도 성공, 완치되자 활짝 웃으며 그들은 한국을 떠났다. 그날밤 인천공항에는 축복처럼 흰눈이 펄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