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고려인마을①] ‘블라디보스토크’의 조명희를 ‘진천’에서 만나다
[아시아엔=임영상 한국외대 명예교수, 아시아발전재단 자문위원] 2020년 8월 19일 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은 러시아 연해주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시 악사콥스카야 공원(옛 극동기술대학교) 내에 ‘조명희 재소한인 작가를 기억하며’라는 이름의 조명희 문학비를 설명하는 석물을 설치했다.
조명희 선생 문학비는 ‘작가모임’이라는 단체가 2006년 세웠는데, 14년 만에 한국정부가 ‘설명석’을 설치한 것이다. 충북 진천 출생인 포석(抱石) 조명희(1894∼1938)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 작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8년 발표된 ‘월북문인의 해방이전 작품 공식해금조치’ 이후에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자이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조명희는 1927년 일제 수탈의 실상과 한인의 저항을 묘사한 단편집 <낙동강>을 발표한 후,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1928년 7월 소련 연해주로 망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머물던 조명희는 <선봉>의 편집자로 참여했다.
1928년 11월 한글신문 <선봉>(창간 1923년 3월)에 한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장편 서사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했다. 한진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조선인’이라고 하지 않고 ‘고려인’이라고 한 것도 ‘짓밟힌 고려’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고려일보> 1992.7.24 ‘민족문학의 진로’/한진)
조명희는 그 후 지속해서 <선봉>에 글을 기고했고 후일 편집자로 참여하여 ‘문예면’을 만드는 등 그의 주도로 현지 고려인들의 문학이 본격 문학의 형식과 구조를 갖게 되었다. 그는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북한과 연변까지를 포함한 고려(조선)인 문학의 전통과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강태수, 조기천, 태장춘, 한진, 정상진, 연성용, 김세일, 한 아나톨리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조명희는 1930년 우수리스크 근교의 육성촌(푸칠로브카), 1931년 우수리스크, 1935년 하바로프스크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선봉>의 편집자로 육성촌농민청년학교 교사로, 고려사범전문대학과 고려사범대학의 교수로, 또 <노력자의 조국> 주필로 활동하면서 재소한인문학 건설에 힘썼다.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에 앞서 소련은 지도자급 한인 2,000여 명을 체포하여 처형했는데, 조명희 역시 친일파이자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1937년 9월 체포, 1938년 5월 공개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총살되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의 가족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1988년 12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시 나보이문학박물관 4층에 조명희 상설전시관이 세워졌고, 1994년 탄생 100주년에 기념사업의 목적으로 그의 생가터에 표지석이 세워지고, 이를 계기로 매년 포석조명희문학제가 개최되는 등 추모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 연변에서는 2001년에 연변포석회가 창립되어, 2002년부터 연변포석문학제가 매년 개최되었다. 2003년에 진천읍 벽암리에 문학비가 건립되고 포석문학공원이 조성되었으며, 2003년 제1회 포석추모 전국시낭송경연대회가 열렸으며, 2006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술대학교 교정에 조명희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1860년대 초반부터 살길을 찾아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은 대부분 함경도 출신이다. 고려인사회에서 ‘시베리아의 페치카’(난로)로 칭송받는 최재형도 1858년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태어났는데, 1869년 아버지 최흥백, 형 알렉세이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 지역 지신허 마을로 이주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한인 명망가들이 러시아 연해주를 찾는 가운데 1911년 새롭게 건설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1920년까지 국외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귀환’ 고려인동포 10만 시대, 광주고려인마을이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을 세우고 고려인의 이주와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또 고려인마을의 어린이공원을 ‘홍범도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안산 땟골 고려인마을 고려인문화센터는 지하에 역사관을 설치했고, 경남 김해 글로벌드림다문화연구소도 ‘동포역사전시관’ 문을 열었다. 고려인마을이 조성되면서 만들었다.
2015년 문을 연 진천의 ‘포석조명희문학관’은 진천에 사는 1천 명에 달하는 고려인동포뿐만 아니라 전국의 고려인동포, 그리고 고려인동포 지원센터 관계자와 연구자들이 꼭 방문해야 할 곳이다.
고려인의 정체성이 확립된 ‘특별한 시기’, 1920~30년대 연해주 고려인사회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충청북도와 진천군, 포석조명희문학관은 조명희문학 행사에 조상의 나라 한국에 정착하는 고려인(청소년)을 초청하는 프로그램(‘짓밟힌 고려’ 낭송회 등)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