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군경’ 활용 공안폭력, 지금은?

10월 혁명으로 권력 잡은 정권은 공안기구 ‘체카’를 신설해 우리 편이 아리나는 의심만 들어도 잡아들여 고문했다. 이는 훗날 소련 공안의 증거없는 체포-고문-투옥-재판없는 처형의 관행 및 전통이 됐다.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1917년 10월 26일, 볼셰비키가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말만 다수파지 1억2천만 러시아인 중 당원은 2만3천명뿐이었다.

10월 27일 황제정부가 임명한 공무원이 파업했다. 은행, 우편, 전신전화국도 동조했다. 본보기 보였다. 512명에 달하는 장차관, 고위 공무원, 교수를 총살했다. 동조자마저도 도망쳤다.

목표는 적은 죽이고, 우리 편 새로 만들라였다. 내전 때 볼셰비키에게 총부리 겨눈 세력은 황제 추종자 백군(Whites) 240만에 혁명저지 외국군대 16개국 25만과 농민군( Greens) 그리고 무정부주의자(Blacks) 등 3백만에 이르렀다. 볼셰비키는 57만, 중과부족이다. 이래서야 체제보위가 불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한다? 레닌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폭력조직이다. 도구는 군과 경찰, 하여 공안폭력을 사용하라고 했다. 1917년 12월 7일 체카를 창설해 이를 통해 폭력을 집행했다. 새 조국 건설에 정당인, 언론인, 학자, 문화예술인 등이 저항했다. “뭘 좀 안다는 인텔리겐치아구먼. 말 많은 자들이야. 제거해!”

이른바 적색 테러(Red Terror)다. 눈앞에 실존하는 적은 당연하고 뭔가 의심스럽고 위험스러운(suspicious and dangerous) 부류도 청소했다. 아이들은 소년단체–>청년동맹을 통해 사회주의 인간형으로 육성했다. 공산당 당원 만들었다. 그 수법은 황제정권보다 더 잔인했다.

출범당시 100명 남짓한 체키스트는 1921년 25만명으로 늘었다. 1명이 국민 548명을 관리했다. 그 해 14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들은 위협청산인(liquidator of threat)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적 즉 인민의 적이라며 할당제를 통하여 분쇄해 나갔다.

현장즉결처분을 하는 마당에 법원은 공안요원+당 간부+검사로 구성된 3인 법정에서 판결했다. 증거는 자백만으로 충분했다. 자백은 ‘설득을 위한 물리적 수단’ 즉 고문으로 받아냈다. 역사책 속의 방법은 다 가져다 썼다.

미 CIA가 운영하던 이라크 전쟁 당시 수용소. 미국은 해외기지에 수감 및 고문용 비밀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즉 △산채로 살가죽 발라내기 △머리가죽 벗기기 △철조망으로 모자나 왕관 만들어 씌우기 △십자가에 매달기 △널빤지에 산채로 묶어 끓는 물이나 용광로에 천천히 집어넣기 등이었다.

여성에게 강간은 기본, 8세에서 18세까지도 지주나 장군 아이들이라며 똑같이 해댔다. 배달차로 위장한 죄수호송차(Black Maria)에 태워 운송했다. 목덜미 쏴서 즉사시켰다. 겐리크 야고다는 고속출세에 일찍 숙청된 케이스. 43세 내무인민위원으로 당과 군 간부 숙청한 스탈린 수족이었으나 3년만인 46세에 실각했다. 혐의는 독일 스파이, 다이아몬드 밀수, 포르노 애호라 했다. 1938년 총살됐다. 그의 나이 47세때였다.

스탈린과 한때 그의 하수인이던 니콜라이 예조프 내무위원. 스탈린은 그를 통해 대숙청을 완료하자 그를 처형했다. 이에 예조프는 ‘사라진 인민위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원래 별명은 키가 151cm로 작가 ‘블러디 드워프(유혈난장이)’ 또는 ‘포이즌 드워크(독살난장이)’로 불렸다. 

예조프는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져 사망. 여동생 총살. 부하 대부분도 함께 처형됐다. 니콜라이 예조프는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노동자로 일했다. 그의 입신양명은 더 빨랐다. 41세 내무인민위원으로 상관이자 전임자였던 야고다를 직접 고문했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예조프를 “고양이 꼬리에 휘발유 묻힌 종이를 매달아 불붙이고는 점점 타들어오는 불길에 공포에 질려 방방 뛰는 모양을 즐기는 악동”이라고 묘사했다. 1937년부터 1938까지 스탈린 대숙청을 주도했다. 130만명 체포, 총살 68만1692명. 강제노동수용소 투옥 68만5201명에 14만명이 굶주림과 중노동으로 사망했다.

민심 흉흉해졌다. 스탈린은 이를 다독거릴 희생양이 필요했다. 예조프가 적임이라고 봤다. 이를 감지하게 되자 불안했다. 술에 절어 살았다. 그만 두면 목숨은 살려주려나? 사표 냈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체포됐다. 후임자 베리야가 조사했다. 독일 스파이, 동성애자 혐의가 씌워졌다. 사형 선고되자 졸도, 울고불고 소리 지르다가 간수에게 끌려 나갔다.

1940년 총살 당시 44세. 야고다나 예조프나 둘 다 공안기관장으로 3년 근무. 그 기간에 호사 부려야 얼마나 부렸겠냐마는 다 부하들에게 총살당했다. 나치독일 국방군 방첩기관장 카나리스 제독은 옛 부하들에게 발가벗겨져 수염과 털 뜯기며 조사받았다. 그 상태로 사격표적 됐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