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파란만장’ 러시아 경찰 변천사

러시아 경찰복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기념우표

쓰레기와 기생충

부랑소년이 러시아혁명 초 7백만명에 이르렀다. 거리 떠돌며 걸식하는 ‘street children’이다. 고사리 손이 도둑질에 물든다. 해 떨어지면 처마 밑으로 모여들었다.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 녹이다 곯아 떨어졌다.

꿈속에서 엄마아빠 만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과 내전으로 죽어간 사람들이다. 대부분 차르편으로 몰려 숙청됐다. 그들의 자식새끼들이니까 역시 반혁명분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방치한다?

1928년 4월 21일 정부합동 전국 노숙 어린이(homeless children) 단속 개시에 들어갔다. 군부대가 도시외곽 봉쇄–>도주로 차단–>경찰이 구역별로 몰아넣어 사냥하듯 검거–>임시보호소 수용 순으로 처리했다.

극렬저항그룹(gang)은 강제노동수용소 이송하고 순응하는 아이들은 소년소녀개척단(pioneer)에 가입시켰다. 거기서 사회주의이념으로 교화시켰다.

1935년 사회주의 인간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이 프로그램은 종료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과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로 되풀이됐다.

우리들끼리

부모형제 있다면 새총 가지고 놀면 된다. 성냥이 빠져서야 되겠냐. 짜릿한 불장난이다. 훔쳐온 고구마 구워 먹고 빈 성냥갑으로 거미 기른다.

집 열쇠는 주머니에 넣었다가는 분실한다. 엄마가 출근하며 목에 걸어준 그대로 놔둔다. 그래야 잃어버리지 않는다. 자, 이제 집에 가자! 고이 모셔놓은 수영복차림의 여자아이 사진 꺼내 본다. 

서기장님이 독재를 한다고? 그러건 말건 사거리 모퉁이나 공원 귀퉁이 점거해서 노닥거린다. 도쿄, 뉴욕, 런던과 다른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새로움 추구한다. 어른 세대에 반발한다. 고유의 언어와 특별한 복장으로 집합한다. 행동으로 저항한다. 반反·집集·행行이 특성이다.

기성세대는 이들을 불량배(hooligan)로 여기며 맘에 들지 않는다. 사회의 기생충이라고도 했다. 체제수호에 위험한 반사회(antisocial) 분자다. 억압받는다.

막아도, 봉쇄해도 서유럽 청소년 또래문화가 러시아에 들어왔다. 왜 우리는 저 애들처럼 청바지 못 입나. 팝송 못 부르나. 의문투성이다.

청소년

런던에 소년 체브Chav족, 몸통과 배꼽 내 논 소녀 체베트Chavette족이 나타났다. 체육복, 야구모자, 운동화가 패션이다.

욕심이야 진품 걸치고 싶은 맘 간절하다. 돈 없으니 다 짝퉁이다. 메이커에서는 평판 나빠진다며 아예 생산중단. 그래도 유행은 여전했다. 

미국도 질세라 티너즈(teeners) 등장했다. 여학생들은 하교하면 서로 가리고 헐렁한 스웨터와 주름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주말에는 변화를 줬다. 사내들의 셔츠와 청바지를 차용했다. 운동화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바비-삭스 신었다. 바비-삭서(bobby-sockers)다.

전쟁 나자 아버지와 아저씨와 오빠는 총 들고 전선으로 나갔다. 엄마는 군수품공장에서 무기 만들었다. 아이들은 쓰레기통 걷어차기 시합한다. 청소년범죄라는 용어가 출현했다.

우상은? 깡마른 몸매. 영혼이 담긴 듯이 보이는 눈. 어법語法이 정확한 가수.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사람들이다. 그의 옷 쪼가리를 보물로 간직했다. ‘my way’ 흥얼거렸다.

일본 제일의 번화가 도쿄의 긴자銀座, 미유키 거리는 저녁 여섯 시경이면 10대들이 몰려들었다.

사내 애들은 아이비풍 셔츠에 면 반바지, 부츠나 스니커 신었다. 여자 애들은 긴 스커트, 코가 납작한 구두나 샌들에 맨발. 펭귄 같았다. 대여섯씩 자리 잡았다.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어른들 눈 흘기며 지나갔다. 뉘 자식인지 한심했다. “아니, 웬일이야. 우리 애잖아!” 3년쯤 계속됐다. 갑자기 사라졌다. 나이 들어서다.

스틸야기

볼셰비키혁명 당시 고문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볼셰비키혁명 후 처음 나타난 청소년 현상이었다. 전쟁 속에 핀 꽃이다. 정치와는 관계없다. 외국패션(foreign fashion)에 대한 동경이다.

스틸야기, 꿈 있으나 돈 없었다. “특권 누리는 자는 정신과 마음이 타락한다”는 바쿠닌 말, “부의 사회적 평등 없이 정치적 평등 없다”던 프루동의 언동을 굳이 반복하지 않았다.

돈 모았다. 암시장에 갔다. 관광객이 팔고 간 중고품, 헌 면직물 염색해 만든 청바지, 복제한 자본주의 팝송음반 샀다. 배꼽티도 비밀리에 대유행! 친구들끼리 모이면 당당하게 선보였다.

1980년대까지 명맥 이어갔다. 공산주의 버리고 자본주의 택한 1990년대. 금지시대의 서양문물이 하루아침에 그 가치가 감소했다. 슬라브족 문화가 부흥했다.

고프닉

고프닉(gopnik)

1주일 내내 일할 필요 있나. 2-3일 근무하고 받는 돈 적더라도 살만 하잖아. 남는 날은 뭐 하냐. 놀지 놀아. 술 퍼마시며 노닥거린다. 스틸야기가 세력 잃자 양아치 고프닉(gopnik)이 출현했다.

복장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소비에트선수단 단복. 삼선three stripes 들어간 아디다스 운동복이었다. 처음 등장한 수입 옷이다. 그만 다들 반해버리고 말았다.

기생충을 박멸하라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양이 불량하게 보였다. 비행청소년도 섞여있었다. 제거대상이었다.

해롭고 위험한 존재라는 개념(socially harm/dangerous elements)이 재등장했다. 스탈린이 1951년에 노숙자homeless에게 적용, 최대 5년형을 부과했던 선례가 있다.

흐루쇼프는 이들을 사회의 기생충으로 규정했다. 1955년 부랑자(vagrancy 浮浪者)법, 1961년 반기생법(反寄生法) 만들었다.

일 안하고 얹혀사는 자를 1961년에는 13만명이나 체포했다. 재산과 돈도 압수, 최대 5년간 노동이 사회에 유익함을 배우게 만들었다.

브레즈네프(오른쪽)와 호네커(가운데) 동독 수상, 왼쪽은 브레즈네프 후임자 유리 안드로포프

브레즈네프는 1966년 불량배(hooliganism)를 표적으로 삼았다. 껄렁패와 건달 잡아들였다.

안드로포프 당시는 어땠을까? 사회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결근과 조퇴를 밥 먹듯 하는 직장인과 노닥거리는 고프닉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다. 건달습성은 고쳐지지 않았다. 여전히 빈둥빈둥.

청소년행태가 미래 풍향계

1960년대 후반 현장사정에 밝은 일선 경찰관들이 청소년들에게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단속하면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그룹과 연합해 대들었다.

체제 취약성을 감지하고 공권력을 무시하려 드는 건가? 뭔가 한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시그널 같았다. 상부에 보고할까? 그랬다가는 우리가 반체제로 몰릴 거야. 침묵했다.

서구 청소년 하위문화도 밀려왔다. 히피족에 이어 1980년대에는 브레이크댄서(break dancers), 오토바이족(bikers), 헤비메탈광(metal heads), 펑크족(punks)이 그들이다.

학생들 대부분이 영어를 제2외국어로 택했다. 영어가사가 어렵다고? 웬걸 속어slang도 다 소화했다. 겉은 러시아인, 속은 USA teenager였다. 서구문화에 친숙했다.

정부는 문화현상을 비행으로 접근했다. 1967년에는 청소년문제위원회로, 10년 후 1977년에는 청소년문제조사처(Inspections for Juvenile Affairs)로 대처했다. 일탈로 본 것이다.

같은 러시아 아들딸의 삶도 차이가 심했다. 한쪽에서는 어머니가 세탁과 바느질로 입에 풀칠했다. 언제나 굶주린 배. 식당이나 가게 쇼윈도 보고 음식을 상상했다. 진수성찬이 뭔지 몰랐다.

어쩌다 돈 생기면 엄마와 동생이 먹고 싶어 했던 빵 샀다. 공원에 앉아 나눠 먹었다.

평등을 꿈꾸던 나라가 복지와 문화는 망각한 지 오래 됐나. 착한 아이들이 범죄자로 변모하는(good-boy-turned-bad-guy) 세상으로 소비에트연방이 가고 있었다.

브레즈네프의 딸

스탈린에게 노예처럼 충성했던 흐루쇼프가 제1인자 됐다. 당과 정부와 기업과 집단농장의 고위간부단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의 철밥통 체질 고치려다가 역공 당해 쫓겨났다.

흐루쇼프가 아끼고 이끌어줬던 공산당 제자 브레즈네프가 그 파워 이용하여 스승 흐루쇼프 밀어내고 서기장 자리에 올라섰다.

브레즈네프가 공약했다. “간부 여러분! 나의 모토는 안정과 안심입니다. 변화를 추구하여 신변을 불안케 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자리 걱정하지 마세요. 귀족 같은 생활 즐기세요.”

행운이 받쳐줬다. 마침 기름 값이 고공행진, 석유와 가스 팔아서 생활필수품 수입했다.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최고급 상품 일색이다. 그들 소수 특권계층에게만 특별히 공급됐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선물받기 좋아했다. 휴가 때 자동차 신나게 몰고 다니는 스피드광이라는 소문도 났다. 좋은 차 많이 들어왔다. 3백24대나 받았다고 한다. 많은가? 적은가?

1975년부터 병이 잦았다. 그런데도 말보로만 피웠다. 노동자농민은 보드카도 감지덕지인데 스카치위스키만 고집했다. 밤에는 잠 못 이루었다. 진통제(painkiller)에 의존했다.

왜 그랬을까? 딸 때문이었다. 도통 말을 안 들었다. 서기장 체통 손상시키는 짓만 하고 다녔다.

1951년 22세 때 열아홉 살 연상의 서커스 단원과 첫 결혼. 1961년 32세 때 열네 살 연하의 마술사와 두 번째 결혼.

1971년 42세 때 브레즈네프 심복인 내무장관 주선으로 일곱 살 위 경찰중령과 결혼했다.

브레즈네프의 사위

유리 추르바노프는 브레즈네프의 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8년 만에 중령에서 제1차관으로 승진했을까?

모스크바대 법학과 출신으로 성격 좋고 용모 준수해 출세하리라고 주위에서 내다봤다. 그런 그가 부인과 두 아이 버리고 브레즈네프 딸 갈리나와 결혼했다. 왜 그랬을까.

선배들의 좌절에 절망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를 비롯한 후배들은 이번 경찰서장급 승진에 주파르스키가 적임자라고 믿었다. 승진자 명단에는 엉뚱하게도 서영이반스키가 올라가 있었다.

문제는 그날 오후에 터졌다. 술이 잔뜩 취한 서영이반스키가 부장실 문을 발길질하고 있었다. 발령이 주 경비과장으로 났으니 500달러를 도로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계급승진에 $4천+서장보직에 $5백=$4천5백을 줬다 한다. 서장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5백은 되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고서도 둘 다 멀쩡하게 얼굴 들고 다녔다. 줄이 튼튼하다는 소문이었다. 서영이반스키의 친척이 서기장의 부인의 동생의 동서라던가. 그래도 돈은 돈대로 들었다. 정가제다.

추르바노프는 부장이 주파르스키 계장에게 골프채를 요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빚을 내서라도 사서 받쳤다면 승진? 골프채 $3천 대 현찰 $4천5백은 밀린다.

이런 때 내무장관이 추르바노프를 불렀다. 브레즈네프 지시로 갈리나의 신랑감 물색하다가 그를 골랐다고 했다. 장가 한 번 더 가고 팔자 고치면 어떤가? 좋습니다! 그렇게 성사됐다.

내무부 제1차관까지 고속승진–>브레즈네프 사망–>내무장관 부정부패로 입건, 자살–>제1차관 뇌물로 12년 형–>부인은 이혼해 달라고 면회 왔다. 도장 찍어줬다. 11년만이었다.

5년 복역 후 57세에 풀려났다. 새 아내 맞이하여 77세까지 살았다.

사진 왼쪽부터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 <출처 잡학사전>


속상했다

소비에트연방이 모습을 막 갖춰 가던 시절, 레닌 죽고 스탈린이 집권한 때다. 반대파 죽여 내 직위 지키기가 국정목표였다.

목표달성 도구는? 사람들에게 쓰레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조직 민경(Militsiya, 民警)의 역량과 충성은 불신했다. 공안사찰기관에 의존했다.

그러나 현장의 궂은일-정적색출, 범행날조-은 전국에 깔린 경찰이 보조케 했다. 하수인이다. 주민들은 앞잡이인 경찰이 더 나쁜 놈들이라며 얼굴 돌렸다.

그래도 실세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예산과 인력과 장비는 공안에게 우선 배정했다. 일손과 물자 부족 속에서 일했다.

처우도 공안에게 훨씬 못 미쳤다. 자연히 손 벌렸다. 공안에게는 1천루블 쥐어준다. 이쪽에게는 돈 없다며 손사래 친다.

윗자리와 물 좋은 요직은 공안이 날라 와 차지했다. 고향사람과 동창만 데려다 앉혔다. 거기에 끼지 못했다. 한직과 변두리로 빙빙 돌림 당했다.

거기다가 웬 입발림은 그리 능숙한지. 말마다 번지르르 침 튀긴다. 거짓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방금 이렇다 하고는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 뗀다.

요즘은 그래도 훨씬 나아졌다. 이름 폴리쨔(Politsiya)도 되찾고. 공안의 성화에서도 일단 벗어났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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