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제국의 근대경찰과 ‘가짜 이강석 사건’
러시아 역대 황제들은 믿고 맡긴 고위직의 부정부패에 넌더리 쳤다. 공안사찰기관장에게 첩보를 수집해 보고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표트르 1세의 근대화 시책에 편승한 부패관료가 많았다. 시베리아 총독 마테 가가린은 개발사업 이권을 나눠주고 뇌물 받았다. 교수형에 처해졌다.
검찰총장 알렉시스 네스토프는 관리들의 부정을 적발하는 한편 뒷돈 받고 많이 풀어준 혐의가 들통나 능지처참.
알렉산드르 멘시코프는 출신이 비천해 글을 배우지 못했다. 배고파 어린 나이에 빵가게에 취직했다. 군대에서는 맘껏 먹는다는 말에 입대. 그의 충성심을 사서 등용, 오른 팔 됐다. 부정축재를 반성할 기회도 줬다. 오히려 욕심 더 내는 무리수를 뒀다.
맏딸을 어린 황제와 약혼시켰다. 정적들은 이래선 안 되지 하며 틈을 노렸다. 1727년 전격 체포. 혐의는 횡령, 시베리아로 추방됐다. 2년 후인 1729년 사망. 당시 53세 좀 이른 죽음이었다.
가짜
시인 푸시킨의 경험담을 듣고 니콜라이 고골이 희곡으로 만든 작품이 <감사관>이다. 뒤가 구린 마을의 관리와 유지들이 모시다가 당하고 만다. 1836년 작품이다.
1957년 우리나라에서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 이강석 사건이다. 8월 30일 경주경찰서장이 깜짝 놀랐다. 밤 여덟시 경 관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고위층 자제였다. 기다리고 있는 다방으로 달려갔다. 왜 이리 늦었느냐는 호통을 듣지 않으려고 서둘렀다. 귀하신 몸께서 어찌 홀로 행차하셨느냐고 머리 조아렸다. 먼 곳에 왕림한 일이 황송했다. 청년은 아버지 밀명으로 왔다 했다. 그 무렵 영호남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쑥대밭 만들었다. 말을 이어나갔다. “풍수해 상황을 살피고 공무원 비리를 내사하는 중이다.” 1957년 8월30일이었다. 이후 경북 북부지역을 돌아다녔다. 군수와 경찰서장이 벌벌 떨었다.
사칭
칙사 대접을 했다. 돈도 쥐어 주었다. 주인공은 강병석이다. 나이 스물둘, 이강석이라고 사칭했다.
이강석이 누군가. 국회의장 이기붕 장남이다. 자유당 정권 제2인자의 아들이다. 나르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세가다. 게다가 대통령 이승만의 양자였다. 9월 1일 밤. 경상북도 도지사 관저에 들어섰다. 어이하랴. 공교롭게도 지사의 아들이 진짜 이강석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3일천하의 막이 내렸다. 가짜는 술회했다. 용돈이 궁해서 꾸민 연극이다. 그렇게 굽실거리고 쩔쩔맬 줄 몰랐다 했다. 징역 10개월.
나중에 진짜가 자살했다. 가짜도 세해 뒤 자살했다. 생전의 연기가 죽음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통령의 처사촌인 일흔네살 노인이 사기 쳤다. 서울 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이 걸려들었다. 국회의원 공천을 받게 해주십사 했다. 30억3천만원을 건넸다.
30억이면 30억이지 끝전 3천만원은 뭔지. 시내버스사업이 적자라 주장을 하곤 했다. 그래도 몇십억 단위로 빼먹는 건 가능한가 보다.
재판소 서기
서류를 기초로 재판이 진행됐다. 그 서류 보는 재판관은 귀족이다. 부자들은 귀찮다 기피한다. 가난한 귀족이 맡아 뇌물 챙겨 생계유지한다. 법률지식도 없다.
실무를 담당하는 서기가 자리를 대대로 물려받았다. 법과 재판실무에 훤했다. 소송서류를 만들고 적용법조 선택해 판결문 작성해서 재판관에게 건네면 읽었다. 판결이다.
소송당사자들은 서기에게 빨리 나한테 유리하게 해달라고 돈 쓴다. 박봉이라 얼싸 받는다. 재판관과 서기는 경매하듯 액수 정한다. 그래서 재판을 경매라고 조롱했나. 무전유죄無錢有罪.
자백이 최상의 증거였다. 자백 얻어내려고 고문했다. 자백 없으면 증거가 없고 유죄가 아니지만 유죄로 추정되는 혐의는 있다고 본다. 혐의형 판결이다, 87.5%나 됐다.
풀려나기는 한다. 죽을 때까지 혐의 뒤집어쓰고 산다. 유사한 사건 일어날 때마다 잡혀 들어간다. 고문당한다. 죽을 노릇이다.
경찰관
1740년 니콜라이 아르하로프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근위연대 장교가 됐다.
1771년 31세. 모스크바에서 페스트가 유행할 때 발생한 폭동과 약탈을 진압했다. 임무를 무자비하게 잘 수행했다고 표창 받았다. 기회를 포착, 경찰대장 자리 땄다.
푸가초프 1774년(34세)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추적해 체포했다. 이듬해 능지처참 집행을 진두지휘했다. 공을 인정받아 모스크바경찰청장으로 승진했다.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어려운 사건을 내려 보냈다. 정보망 통해 첩보를 입수, 직접 심문해서 해결했다. 종종 알현하는 영광 누렸다.
37세 나던 1777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모스크바를 비롯해 여러 곳의 지사를 지냈다. 1795년, 55세 되던 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사가 됐다. 로비를 해서 동생 이반을 모스크바 경비대장에서 모스크바 총독으로 영진시켰다. 경비대를 형제 이름을 따서 아르하로프스키로 불렀다. 위세가 대단했다. 황금기 이어졌다.
1796년(56세) 새 황제 파벨 페트로비치에게 유형 당했다. 수도접근금지령도 떨어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주위사람들은 알았다. 어깨에 힘들어가서 그런 거였다.
74세 되던 1814년 사망했다. 조문 갔다가 혹시나 공안에게 들켜 찍힐까 두려웠다. 그래도 그가 육성한 형사들은 저 멀리서나마 고개 숙였다.
농노
러시아제국의 두 기둥은 전제정치와 농노제도다. 이 둘은 귀족이 좌지우지했다. 귀족세력의 협력이 있어야 황제의 통치가 가능했다. 농노가 있어야 농사를 지어 부를 늘렸다.
1497년 농노제도가 시작된 이후 ‘한번 농노는 영원한 농노’였다. 생사여탈권은 귀족인 지주가 장악했다. 황제들은 정권 버팀목인 귀족에게 농토를 선물했다. 농노가 딸려갔다.
부끄러운 제도였다. 어느 지주는 개 몇 마리를 데리고 와서 다른 지주의 농노 어머니와 교환했다. 자식은 딴 데 팔았다. 비정했다.
내 몸이 아닌 내 몸
1주일에 사흘은 지주농토에서 부역했다. 무보수다. 사흘은 내 농사지었다. 수확을 하면 소작료 갖다 바친다. 이런저런 세금에 인두세人頭稅도 낸다. 병역의무도 진다.
1721년 인두세 납세자는 모두 550만명으로 전 인구의 41%였다. 그 중 도시민은 3%, 농노가 97%로 548만3500명이다. 10만 지주가 소유한 농노였다. 한 집에 평균 31명이다.
돈 벌어서 자유를 사라고? 땅에 묶여 사는데 어디서 뭘 해서 돈 버나. 여행허가는 나오지도 않는다. 내뺀다 해도 추적자가 뒤따라온다.
용케 피한다 해도 어떻게 먹고 사나. 걸식하며 유랑한다. 걸인이 많은 이유다. 나만 이런다면 참기라도 하지만 자식도 똑 같은 신세다. 결혼도 지주의 허가가 필요하다. 말 그대로 사람의 삶이 아니다.
학대와 살인은 비일비재
1730년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다리야 살티코바는 귀족청년과 결혼했다. 25세에 과부가 됐다. 두 아들 데리고 영지에서 살았다. 재물은 날로 쌓였다. 애정은 날로 고갈됐다. 굶주렸다.
26세 청년과 눈이 맞아 사랑 나눴다. 이내 다른 젊은 여인과 몰래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배신감에 휩싸였다. 화풀이 대상을 찾아냈다. 6백여명이나 되는 농노였다.
뜨거운 물을 온몸에 부었다. 머리털에 불을 붙였다. 불에 달군 집게로 지져댔다. 발가벗겨 동사시켰다. 절단하여 버렸다. 10대도 죽였다. 대부분 여성이었다. 임산부는 남편이 배 위에 올라가 뜀뛰게 만들었다. 피투성이 태아가 허공을 날았다. 아기아빠도 죽였다.
관청에 고소를 해도 소용없었다. 살티코바의 돈 먹은 관리가 어디 한 둘인가. 동네사람이 공안사찰기관에 진정서 냈다.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귀에 들어갔다.
1757년(27세) 때 조사가 개시됐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 증인이 나오지 않았다. 10년을 끌고서야 38명 살해로 마무리됐다. 사형제도가 폐지되어 종신형으로 낙착.
1768년(38세) 모스크바광장에서 “나는 사람을 고문해 죽였다”는 팻말을 목에 걸고 조리돌림 당했다. 이어 수녀원 지하 독방에 감금돼 쇠고랑 찬 채 33년을 지냈다. 1801년 사망했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두 아들은 그녀보다 훨씬 일찍 세상 떴다.
경찰은 귀족, 지주, 고관, 부자의 비리에 손대지 못했다. 상처 되어 남았다. 농노는 러시아의 멍에, 볼셰비키혁명의 기폭제이기도 했다. 노동자란 다름 아닌 고향 떠나온 농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