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의 거꾸로 역사] 증오와 애증…스탈린과 트로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 빈(Wien). 사람마다 자기네 모국어로 불렀다. 체코사람은 비덴, 헝가리인은 베치, 영어로는 비엔나. 유럽의 중부 도나우강-영어로 다뉴브강-상류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위치가 좋았다. 사람과 문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요충지. 융성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기꾼, 모험가, 망명자, 여행가, 스파이들이었다. 국제도시였다. 애국가는 독일어를 비롯한 12개국 언어로 공식 번역됐다. 군대도 12개국 언어로 지휘하고 명령했다.
빈 북역의 망명 혁명가 둘···트로츠키와 스탈린
1913년 1월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서 온 열차가 빈의 北역에 도착했다. 허름한 손가방 하나 들고 내렸다. 변장한 티가 났다. 조심스레 주위를 훑어봤다. 여권 꺼냈다. 이름은 스타브로스 파파도포우로스Stavros Papadopoulos. 위조였다. 쪽지 꺼내 찾아갈 곳 확인했다. 서둘러 역을 나갔다.
트로츠키Trotsky는 현관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노크 소리가 났다. 작은 키에 야윈, 검붉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동지들이 코바Koba라 부르는 스탈린Stalin이었다. 두 혁명가가 이렇게 만났다. 생면부지였다.
34세 동갑내기. 도망자 신세였다. 황제정부 무너뜨리고 노동자 세상 만들려고 했다. 한 달을 함께 보냈다.
자동차공장 工員 출신 유고 지도자 티토
그때 남쪽 동네 다임러자동차공장에는 21세의 조립공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가 있었다. 노동자의 일상은 고달팠다. 인생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 혼자만이 아니라 다들 평등하게 잘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장래의 나는 잘 살게 되는가.’ 생각 많은 청년기에 겪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빈 주민 중 걱정 없이 먹고 산 사람은 1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왕족과 귀족과 상공업자였다. 부자동네에 모여서 부유하게 살았다. 널찍했다. 깨끗했다. 가로등도 밝았다.
시민 2백만명은 슬럼에서 살았다. 더러웠다. 1683년 빈을 침공하려다 실패한 오스만터키 군의 배낭에서 발견했다는 커피는 그림의 떡이었다. 마실 여유가 없었다. 곤궁했다.
“좋은 시절은 언제 오는가?”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찬스였다. 군대경험이 그를 인물로 만들었다. 나중에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의 지도자 됐다. 티토 원수Marshal Tito다.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싸구려 간이숙박소에 스물네살 미술학도가 둥지 틀고 있었다. 1908년에 와서 미술학교에 응시, 연이어 낙방. 좌절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영 딴판이었다. 독일민족의 순수성에 대하여 열변 토했다. 유대인의 죄악과 불결을 논했다. 슬라브인은 배신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3년 24세, 미술가 꿈 접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정치로 방향을 틀었다. 이듬해 전쟁이 났다. 우선 군대를 경험하기로 했다.부평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네살 때 가족이 빈으로 이주했다. ‘마음 속 비밀’ 열기에 성공했다. 정신분석학자로 승승장구했다. 1913년 57세. 명예와 부를 다 쥐었다. 유대인이라서 생명이 보장되지 않았다. 위험하면 이사 가고 위태로우면 이민가야 하는 떠돌이였다.
빈에서 같은 하늘 이고 살았던 히틀러.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나치는 무조건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인다는 주위의 경고를 애써 무시했다.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정신의학의 대가도 끝내 버티지 못했다. 런던으로 망명. 이듬해인 1939년 83세로 작고했다. 맘 편히 산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프로이트와 히틀러 서로 마주친 적 있었을까
프로이트의 단골카페 란트만Landtmann. 그리고 히틀러와 트로츠키가 어쩌다가 커피를 마셨던 카페 센트럴Cafe Central은 이 시각에도 영업 중이다.
히틀러와 트로츠키. 혹시 “어, 어, 저 사람 같은 단골이잖아!” 서로 아는 체 했을 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를 혐오했고, 트로츠키는 파시스트를 비난했지만 말이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애증愛憎
스탈린은 구두수선공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눈에 띄지 않게 레닌을 도왔다. 레닌이 서기국 국장에 임명했다. 서류 더미와 씨름하는 사무직이었다. 그러나 당의 운영과 인사에 관련된 중요한 행정업무였다.
이 동지가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 들어줬다. 저 당원이 자리를 부탁하면 마련해 주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트로츠키는 부잣집 출신 유대인. 볼셰비키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화려한 길을 걸었다. 두뇌명석한 지성인, 논리에 강한 이론가였다. 그 점 누구나 인정했다. 하지만 정나미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 없이 내쳤다.
독불장군 트로츠키 나타나면 피했다. 모두 쉬 쉬 쉬 하면서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입만 살아서 우쭐대는 소수의 엘리트만 모였다.
레닌이 죽었다. 당 간부들은 트로츠키가 집권하면 우리 모두 숙청당한다며 지방에 가있는 트로츠키를 제치고 스탈린을 레닌 후계자로 추대했다. 소문 듣고 올라온 트로츠키는 물만 마셨다.
정권 잡은 스탈린 표변했다. 나야말로 서기국장을 서기장으로 만든 공로자라고 거들먹거리는 자들부터 죽여 나갔다. 아니, 스탈린이 멍청이 연기를 10년 가까이 해왔구나. 그는 ‘가짜 멍텅구리’고 우리가 ‘진짜 얼간이’였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0년대 말까지 다 죽였다.
딱 한명 남았다. 스탈린이 망명을 허가한 트로프키다. 왜 망명 보냈나! 한탄했다. 내내 후회했다. 스탈린의 첩자가 멕시코에 있는 트로츠키를 죽였다. 20년이나 걸린 마지막 과제 해결이었다. 스탈린은 비로소 발 좀 뻗고 자기 시작했다.
티토가 스탈린에게 준 그림이 가짜였다면
티토: “긴한 일이야. 스탈린 만나게 해주셔.”
흐루쇼프: “왜 나에게 부탁하느냐.”
티토: “당신 말이라면 다 듣는다는 소문이 났어.”
흐루쇼프: “이 양반, 큰일 날 소리하네.” 하며 주선에 나섰다.
흐루쇼프 안내를 받아 스탈린 만나러 별장dacha에 갔다. 선물용 명화도 한 점 지참했다. 밤 11시에 연회 시작.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췄다. 술로 위가 차면–>화장실 가서 구토–>위 비우고–>또 마시고–>다시 토했다.
티토: “뱃속 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스탈린: “뭘 그리 자주 가는 거요.” 붙잡는다. 옷소매 속에 토했다
스탈린의 수법이었다. 잔뜩 취하게 만들어서 흘러나오는 취중진담 끌어냈다. 충성과 불충 가려내는 작업이었다.
새벽 다섯시에 끝났다. 할 얘기도 못했다. 선물로 가져온 그림도 전하지 못했다.
티토는 예술품을 모았다. 전용 박물관도 만들었다. 중개인은 크로아티아 태생의 예술품 수집가 Ante Topic Mimara였다. 위작僞作을 많이 취급한 사기꾼이었다. 만약 가짜를 스탈린에게 주고 왔다면? 피바람 불었을 터이다.
나치 실력자 헤르만 괴링은 Ante 통해 50만달러를 주고 그림 샀다. 대금은 전부 위조지폐였다. 위작에 위폐로 대응한 셈이다. Ante는 화가들과 중개상에 쫓겨 도망 다녔다. 생사불명.
스탈린의 마지막 닷새
1953년 2월 28일 토요일 23:00. 스탈린은 심복 4인조와 더불어 그의 별장에서 고향 그루지야 특산품 포도주를 진탕 마시기 시작했다. 3월 1일 일요일 04:00. 파티 끝났다. 자러 들어갔다. ?22:00 경호팀 이상하다는 느낌 들었다. 문 부수고 들어갔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3월 2일 월요일. 자는 거니까 내버려 두라고 했다. 3월 3일 화요일 09:00. 바닥에 넘어진 후 35시간 만에 의료진이 뇌출혈로 진단했다. 치료나 수술할 생각 안했다. 누구도 살리고 싶지 않았다. 비밀엄수만 엄명. 누설하면 총살!
3월 4일 수요일 09:00. 라디오 긴급뉴스 “우리 지도자가 와병 중이다.” 3월 5일 목요일 09:50. 구토–>객혈–>호흡곤란–>숨 거뒀다. 73세. ?3월 6일 금요일 사망 공식발표.
스탈린이 죽기만을 바란 심복 4인조. 그들의 인생행로는?
?① 부수상 베리야: 정권경쟁에서 밀렸다. 체포, 고문, 총살.
② 국방장관 불가닌: 수상까지 지냈다. 더 욕심내지 않았다. 은퇴 후 연금생활.
③ 연방 부의장 말렌코프: 스탈린 와병 중에 임시 후계자로 추대됐다. 정식 후계자 되려고 욕심 부리다가 당에서 추방.
?? 당 중앙위 서기국 국원 흐루쇼프: 제1서기 되어 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