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사회사 ‘영국 유니폼’①] 제복 변천을 보면 시대가 읽힌다

1780년 고든 폭동을 진압하는 영국 군. 당시 경찰이 아직 생기기 전이어서 군이 강경 진압에 나섰다. 국민들 비난이 군에 쏟아졌다.

중세엔 물건 만드는 장인과 상품을 파는 상인. “우리는 같고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고 표시하고 싶었다. 유니폼 만들 돈은 없었다. 우선 배지badge 휘장을 달았다. 소속·신분·계급의 표시다. 신분증이다. 그러다가 통일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동류성과 정당성을 알렸다. 자격증이다.

고귀하신 왕후장상은 관복을 입었다. 디자인과 색상은 독점이다. 무자격자 시정잡배가 입으면 당장 잡아들였다. 주인과 하인도 옷이 달랐다. “수하 잡것들이 내 옷 흉내 내서 입는다고? 고것들 별짓 다 하네. 이참에 아예 제복livery 만들어 입히세.”

유럽 중세의 장인과 상인은 직종마다 조합길드)을 만들었다. 이를 나타내는 휘장도 사용했는데, 한눈에 취급품목이 구별됐다.

산업전사-병사-혁명투사

산업혁명이 진척됐다. 공장노동자 관리방책이 현안으로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더 부려먹지? 옳거니 군복을 모방하자. 작업복 입혀 일사불란하게 일 시켰다.

볼셰비키Bolshevik 시대, 한정된 디자인과 컬러의, 꼭 유니폼 같은 의류를 국영상점에서 판매, 배급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시베리아에서도 같은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소비에트연방의 여성의류는 대량생산해 전국적인 배급 판매체제였다. 다양성은 당연히 떨어졌다.

모택동은 자신이 입고 있는 인민복을 강제하기 위해 패션쇼도 열었다. 이를 통해 혁명의식을 제고시켜 계급평등, 나아가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애썼다. 성공했을까?

beauty는 ideology의 적?

자신을 옷으로도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결국 막지 못했다. 천편일률monotony에서 탈피하려고 수선했다. 저항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추구였다. 그때 참고한 정보가 있다. 동서유럽을 가로질렀다는 이념장막(Iron Curtain)의 바퀴벌레cockroach나 다닐 구멍으로 들어온 서쪽 소식이었다.

소련을 철의 장막이라고들 하지만 사람 왕래를 제외하고는 문물이 자주 드나들었다. 서구와 동양의 지식인은 공산주의 이념을 동경했다. 반면 소련의 청소년들은 미국 패션에 홀딱 빠졌다.

파리를 점령한 나치는 파시스트 냄새나는 유니폼을 권장했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고 겁줬다. 그런다고 순순히 따르는가. 프랑스 여인들이 대들었다. “니들이 점령군이라고 해서 우리들 스타일까지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다!”(You can occupy us, but you can’t take our style.)

통굽구두platform shoe 신기 운동을 전개했다. 개인의 표현행동에 대한 강탈robbing과 신체통제body control에 대한 비토였다.

2차세계대전 나치의 파리 점령기간 유행을 추구하는 파리 여성이 통굽 구두를 신음으로써 나치의 유니폼화 정책을 무산시켰다.


런던에 경찰이 필요하지만!

18세기 후반 120만명이 사는 런던의 치안을 야경night watch夜警이 맡았다. 근대경찰의 필요성이 논의는 됐다. 하지만 성사는 되지 않았다. 왜? 프랑스경찰의 정치염탐 활동을 들여올 우려 때문이었다. 파리의 시민 셋 중 하나가 경찰 끄나풀이라니!

1750~1835년대 영국 보병 유니폼이다. 옷색깔을 붉은색으로 한 것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장거리포가 개발되자 되레 표적이 되면서 카키색으로 바꿨다.

우리 영국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 아냐! 그럴 리 있나! 그만큼 국민에 대한 spy활동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차에 1780년 6월 8일. 런던에 고든폭동Gordon Riots 터졌다. 약탈과 방화가 횡행하여 급기야 군 동원으로 겨우 불을 껐다.

1819년 8월 11일. 맨체스터 세인트피터광장 정치집회에 기병대가 난입, 총검 휘둘렀다. 남녀노소 15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6백이 넘었다. 피털루학살Peterloo Massacre이다.

경찰 복장은 군복과 차이 나게 네이비 블루로 했다. 


군인과는 다르게 만들자

군에 대한 국민반감이 극에 이르렀다. 반면 군인들은 볼멘소리를 냈다. 왜 우리가 폭동진압 악역을 맡아야 하나?! 군 고위층으로부터도 더 이상 치안활동을 하지 않겠다. 경찰 만들라고 압력을 가했다. 국민여론도 경찰을 창설하자는 쪽으로 돌아섰다.

1829년 이런 기류를 타고 근대경찰의 효시 런던경찰청이 드디어 고고呱呱의 소리를 냈다. 제복에 특히 신경 썼다.

데모 진압한다고 국민 살상한 군대의 붉은 색 유니폼과는 달라야 했다. 감청navy blue紺靑 색깔로 경찰복 만들었다.

일본 수도 도쿄의 경찰 제복. 고반파출소 앞에서 입초 근무중이다. 위가 평평한 케피모자에 사브르 칼을 착용하고 있다. 


uniform for special profession

복장으로 집단사고를 키우고 집단행동을 보장해야 하는 직업군이 있다. 의사, 간호사, 군인, 교도관, 소방관, 경찰관이다. 교사들은?

오늘날 경찰제복은 런던경찰이 그 모델이다. 1829년 창설부터 1839년까지 청남색의 연미복swallowtail coat를 걸쳤다. 깃은 당시 빈발했던 목 조르는 강도에 대비한 높은 깃high collar. 여름에는 흰 바지를 입었다.

                                   영국경찰의 유니폼 변천사

1863년 연미복을 몸에 딱 붙는 재킷tunic으로 변경했다. 1948년에는 셔츠 깃을 풀어 놓은open-neck style이 됐다. 모자는 실크해트silk hat. 난로연통 같은 모자stovepipe hat 또는 top hat라고도 불렸다. 나중에 custodian helmet으로 바꿨다.

유니폼은 스파이 의혹을 없애려고 상시착용. 근무 시에는 완장duty band을 찼다. 일이 끝나면 완장을 뺀 후 제복차림 그대로 집으로 갔다.

                                   1890년대 경찰 모습

1968년이 되어서야 완장을 없앴다. 하긴 초창기는 기율이 엄했다. 민간인과는 식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뇌물로 징계했다. 결혼은? 서로 사랑하면 오케이?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 상사에게 보고하고 배우자 및 그 가족 신원조사를 실시한 후 적정하면 허가했다. 전과자 집안은 물론 불허했다.

여경 모자는 보울러(중산모)라고도 불린다. 초기엔 짧은 경찰봉과 수첩을 핸드백에 넣고 다녔다.

총은 휴대하지 않았다. 지원요청용으로 딸랑딸랑 딸랑이rattle를 들고 다녔다. 나무로 만든 경찰봉wooden truncheon은 코트 안 호주머니에 넣어 숨겼다.

영국 수도 런던 거리의 경찰제복 트렌치코트와 커스터디안 헬멧을 쓰고 있다. 1919년 모습이다. 현행범을 잡아 추궁중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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