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체카’에서 1991년 ‘KGB 해체’까지 러시아 공안 ‘흑역사’

흐루쇼프 서기장(오른쪽 두번째) 밑 2인자였던 브레즈네프는 1964년 KGB를 이용해 마침내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가난한 농민 아들 베리야

라브렌티 베리야는 가난한 농민아들로 태어나 21세에 공안 체키스트가 됐다. 스탈린이 고향에 들렸을 때 지구당 위원장이 베리야를 쓸 만한 젊은이라며 소개했다.

스탈린의 보살핌 받았다. 모스크바 중앙정계로 끌어 올려지자 충성을 다했다. 39세에 내무인민위원에 등극.

경찰과 공안의 50%를 파면하고 고향사람들로 채워 완전히 장악했다.

잘 나가자 키운 부하 의심하는 스탈린 병이 도졌다. “이거, 처치해야 하는 거 아녀?” 하다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후계자는 베리야라고 자타공인, 다 된 밥이었다.

스탈린이 죽은 지 네달 다 되던 그해 6월 26일 당 정치국 상임간부회에서 흐루쇼프가 베리야를 가리켰다. “영국 스파이다!” 흐루쇼프의 공작에 넘어간 참석자들은 베리야에 대해 “배신자!”라고 합창했다.

스탈린과 베리야

베리야는 오랜 친구이자 정권 공동인수를 밀약한 말렌코프에게 도와달라는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말렌코프는 차갑게 비웃었다. 책상 위 벨을 눌렀다. 장군들이 들어와 베리야 체포.

12월 23일 “스파이 혐의로 사형.” 그 소리 듣자 휘청, 무릎 꺾였다. 목숨만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이마에 권총탄환 박혔다. 그의 나이 54세때였다.

“아직 이릅니다”…알렉산드르 셀레핀

1960년 흐루쇼프의 개혁이 한창이었다. 특권관료 노멘클라투라 75만, 가족포함 3백만명은 귀족 같은 생활 즐겼다.

목 잘리면 모든 걸 잃는다. 불안했다. 흐루쇼프 반대그룹이 되어 살길 모색했다.

브레즈네프, 서열 2위. 1인자 되고 싶었다. 방위산업 전문가라 군 인맥은 확보한 상태. 관료들에게 자리 보장한다(job security)고 제시하며 내 편으로 만들어 나갔다. KGB도 회유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소문 듣고서도 태연자약 했다. 왜냐고? 공안경력 없는 즉 자기사람 없는 즉, 쿠데타 동원력 없는 셀레핀을 앉혀 놨기 때문이었다.

“어떠신가? 함께 거사하세”. 셀레핀 “내 사람 별로 없습니다. 말 안 듣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모스크바 비양카 거리에 있는 공안 거점 빌딩. 체카 창설자 동상은 소련 해체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됐다. 

1961년 11월 13일 셀레핀이 KGB를 떠났다. 후임에 블라디미르 세미차스니트를 천거, 받아들여졌다. 공산주의청년동맹 후배였다.

1964년. 셀레핀이 브레즈네프에게 KGB 직원 물갈이 이뤄졌다고 알렸다. 10월 14일 거사, 흐루쇼프 실각. 4년 걸렸다.

유리 안드로포프…유일무이한 KGB 출신 서기장

 1967년부터 1982년까지 KGB 위원장으로 15년 재직했다. 공안조직의 부패와 비능률을 척결해 나갔다.

시대흐름에 역행, 반체제와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 레닌의 공산주의로 회귀하고자 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건의, 소련을 수호하려다 되레 소련을 몰락의 길로 내몰았다. 1982년 브레즈네프 죽자 안드로포프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68세 최후의 늙은 볼셰비키였다.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젊은 개혁파 기용, 뜯어고치려고 애썼다. 지병으로 1년 4개월 만에 사망했다.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안드로포프 밑에서 대사관과 KGB에 근무한 공안전문가. 1988년 고르바초프가 KGB 위원장에 임명.

1991년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8월 쿠데타 일으켰다. 투옥 후 1994년 석방된 후 83세로 사망. 공안기관을 그만두면 장수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917년 볼셰비키공안 Cheka 창설부터 1991년 공산당공안 KGB 해체까지 74년 동안 공안기관장은 21명. 평균임기는 3년반이었다. 최고 권력자와 쿠데타 주모자를 각각 한명 배출했다.

5명 처형, 4명은 정권 지켜주는 숙청하수인 노릇하다 숙청, 총살당했다. 1명은 정권 탈취하려다가 죽은 베리야다. 이때부터 KGB가 정권지킴이에서 정권탈취 거점세력이 됐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