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사회사] 러시아 최고 처형집행관 블로힌…그도 결국 숙청대상 리스트에

프랑스혁명 당시 푸키에 탱빌 검사에게 단두대에 세워진 마리 앙투와네트

공안의 처형대장 바실리 블로힌은 1921년 26세에 체카에 들어갔다. 고문과 처형 같은 black work에 두각 드러냈다.

스탈린의 암살지시를 은밀하게 수행했다. 1926년 31세 나던 해 내무인민위원회 총살형 집행대장으로 임명됐다. 공식직함은 루비앙카 교도소 사령관.

처형 수순은 해가 지면 처형대상자는 붉은 색 대기실(Leninist room)으로 입실해 신원 확인을 받은 후 수갑 채워 방음장치 된 옆 처형실로 이동해 대기했다.

집행자는 모자를 쓴 채 어깨까지 덮는 장갑에, 앞치마를 둘렀다. 피가 튀어도 세탁 편리한 가죽제품이다. 집행은 고장 잘 나지 않는 나치 기관원용 독일제 발터 권총으로 목덜미 쐈다.

바실리 블로힌(왼쪽). 그가 처형한 사람들 시신

3분에 1명꼴, 하루 밤 목표는 3백명이었다. 처형자가 쓰러지면 끌어내 트럭에 실어내고 물 뿌려 피를 씻어낸다. 시체를 실은 트럭은 매립장으로 가서 불도저로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내려놓는다. 다 차면 흙으로 덮는다.

동 트면 작업 종료, 비밀이 새지 않게 했다. 작업 전에는 음주엄금. 일 다 끝나면 보드카를 지급해 목 축이게 했다. 술에 취해 잠속으로 들어갔다. 100% 알코올 중독자 됐다.

1940년 4월,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와 경찰관 포로 2만2천명을 처형했다. 블로힌은 이때 혼자 7천명을 28일에 걸쳐 총살했다. 하루 250명이라는 세계기록을 수립하고, 소장까지 진급했다.

그런 그가 숙청대상자 리스트에 올랐다. 스탈린은 그런 일(wet work 혹은 black work)하는 사람도 필요하니 죽이지 말라 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하자 강제전역돼 2년 후 사망했다. 그의 나이 60세.

비신시키

숙청의 공동연출자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1908년 황제정부 전복활동으로 수감 중 4살 위 스탈린을 만났다. 형처럼 의지했다. 1917년 케렌스키 임시정부 때 페테르부르크의 경찰서장으로 재직, 레닌을 체포하려 다녔다.

10월혁명으로 총살당할 운명으로 전락했다. 이때 스탈린이 구원의 손길 내밀었다. 일자리 줬다. 혁명과 법률가의 관계를 연구했다.

틈틈이 프랑스혁명 재판을 공부했다. 검사 푸키에 탱빌에게 매력 느꼈다. 푸키에는 부농의 아들로 검사직 구매한 법복귀족(法服貴族)이다. 7년 후 팔아서 빚 갚고 파리경찰청 서기로 들어갔다.

혁명 일어나자 열두 살 아래의 로베스피에르에게 붙어 혁명검사 됐다. 앙투와네트 왕비와 은혜 입은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냈다. 검사 된 지 2년 만에 같은 곳에서 죽은 인물이다.

러시아 공안은 말 그대로 고문에 관한 한 무소불위였다. 


잘도 죽이고 잘도 살았다

1931년 비신스키에 대해 스탈린은 친구인 듯 아우인 듯 대해줬다. 검찰총장으로 임명. 1939년까지 스탈린이 원하는 정적제거 대숙청에 몸 담았다.

공개여론재판(Show Trial)이 열렸다. 검사 비신스키는 외쳐댔다. “피고인들은 거짓말쟁이에 제국주의 광대다! 미친개들은 쏴버려야 한다!”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사형하라 했다. 개가 개라며 소리쳤다.

역전의 당 간부를 굶기고 두들겨 패 자백서 받아냈다. 장군은 이등병이 고문했다. 서구 지식인들의 스탈린 숭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매일 1천명을 유죄로 조작, 죽였다.

1940년 외무차관-장관을 거쳐 유엔대사로 임명됐다. 1953년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 출국해서 숙청 면했다. 이듬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71세였다.

비신스키의 제자 프라이슬러는 나치 법률가였다. 인생살이가 영 쉽지 않았다. 1934년부터 1942년까지 법무차관에 머물렀다. 경쟁자는 다 승진하는데 언제나 그 자리였다.

이유가 있었다. (1) 동생이 반체제 운동가를 변호했다. 미운 털 밝혔다. 동생의 자살로 해결됐다. (2) 1차세계대전 중 러시아의 포로가 됐다. 수용소에서 정치위원 및 식량담당으로 연명했다.

장관후보로 추천되면 히틀러가 질색했다. “빨갱이였잖아!” 혹은 “Old Bolshevik야! 안 되지 안 되고말고!”라고 했다. 벌충하려고 히틀러 입맛에 맞게 나치 법 이론을 정립했다. 열등민족 씨 말리기, 기생충인 비행청소년과 범죄자 제거를 뒷받침했다.

1938년 모스크바 Show Trial을 참관했다. 비신스키의 일거일동을 스케치했다. 나중에 써먹을 요량이었다. 1942년 선전장관 괴벨스가 면죄부 주자고 건의해 겨우 인민법원원장에 앉았다. 히틀러에게 충성한다며 거의 다 사형 때렸다.

암시장 상인 사형시킨 마당에 히틀러 암살미수범들은 당연히 다 총살이었다. 전쟁반대 전단 뿌린 17세 소년을 비롯해 1백명 가까운 청소년을 처형시켰다. 피의 판사라는 별명 얻었다.

1954년 52세 때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 때 무너진 기둥에 깔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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