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국문과 ‘전설의 선배시인’···권기호·전재수·권국명·도광의·양왕용·이창윤·윤성도·이정우

권국명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경북대 문리대 국문과에는 전설적 선배들이 다수 있었다. 모두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감흥을 얻고 강의를 들었으며 자극을 받은, 그중 상당수는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런 경력의 소유자들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김춘수 시인의 문하생으로 일종의 동문 엔솔로지라 할 수 있는 “에스프리(Esprit)” 동인을 결성했다. 사화집(詞華集)도 꽤 여러 권 발간했다. 이 에스프리는 기지(機知), 재치를 뜻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말이다. 영혼, 마음, 정신을 뜻하기도 한데 그 내부엔 발랄함, 청신성도 함께 들어있다. 토론과 환담을 유난히 즐기며 세련된 철학적 사고까지 지녔으니 이는 프랑스인들의 삶의 자존심과도 직결된다.

경북대 출신 문인들로 구성된 시동인지 <에스프리>가 지향하는 추구도 이런 세련미에 대한 남다른 갈망이 담겨져 있다. 주요멤버들은 권기호, 전재수, 권국명, 도광의, 양왕용, 이창윤, 윤성도, 이정우 등이다.

훨씬 이후에 이하석과 나도 합류했지만 동인지에 작품도 내지 못한 채 에스프리는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춘수 시인이 오래 머물던 경북대를 떠났기 때문이다.

김춘수 시인은 옷차림부터 세련되었다. 양복을 입더라도 그 디자인이 평상의 스타일과는 현저히 차이가 나는 그런 중요한 포인트가 꼭 있었다. 이를테면 플란넬 천으로 된 양복을 즐겨 입으셨는데 왼쪽 가슴의 주머니에 뚜껑을 달아서 자꾸만 그곳으로 시선이 가곤 했다.

상식이나 상투성을 뛰어넘는 그러한 삶이나 사고를 시창작에서도 철저히 지니고 이를 체질화시켜야 그 독특함이 고유의 개성으로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이는 김춘수 시인이 평소 늘 강조하던 그런 취지나 방향성이기도 했다.

에스프리 동인들은 사는 곳도 일정치 않아 정례적 모임도 갖기가 어려웠고 어쩌다 서울에 거주하는 전재수 시인이 대구로 내려올 때 연락 되는 이를 소집해서 몇 명이 모여 식사와 환담을 나누는 정도였다.

전재수 시인은 고교 교사를 지내다가 학원계로 진출해 인기명강사로 유명했다. 너무 과로에 시달렸던지 50대 중반에 작고하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해병대 출신의 권기호 시인은 줄곧 김춘수 시인 곁에 꾸준히 머물며 끝내 경북대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도광의 시인은 일생을 대건고등 교사로 재직했으며 다수의 시인 제자를 길러내었다. 박덕규, 하응백, 안도현, 이정하 등이 그들이다.

이창윤, 윤성도 시인은 의과대학 출신으로 시를 썼다. 이창윤은 마해송 선생의 아들 마종기 시인처럼 진작 미국으로 이주해서 소식이 끊어졌다. 일찍부터 연주자로서 대구시향 멤버였고 미술과 기계체조에도 조예가 있었다.

윤성도 시인은 산부인과 전공의로 시집도 여러 권 발간했고,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다. 또 화가로서 개인전도 해마다 열었다. 동산병원 원장도 지냈으며 지금도 계명대 의대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 이정우 시인은 기자를 거쳐 신학대학을 다시 다녀서 신부가 되었는데 몇 해전 세상을 떠났다. 시집도 여러 권 발간한 바 있다.

권국명(權菊命, 1942~2010) 시인은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했다. 물론 김춘수 시인의 추천이다. 초기엔 무속신앙, 즉 한국의 샤머니즘에 남달리 관심이 깊어서 자료를 수집하고 다녔다. ‘무명고(無明考)’, ‘파천무가(芭天巫歌)’ 등의 꽤 중후한 연작시가 그 결실이다. 이후 그의 시적 관심은 불교를 거쳐 가톨릭신앙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세례명은 알로이시오.

대구 효성여중 국어교사를 지냈으며 교감직으로 오래 근무하다가 대구가톨릭대학 국문과로 옮겨서 하고싶은 시학 강의를 마음껏 했다. 늦깎이로 교수가 되기까지 뒤에서 애쓴 분은 후배 이정우 신부였고 도움이 컸다. 권 시인은 키가 아주 큰 편이었고 음성도 둔중했다.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공명이 느껴졌다.

그리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선배로서의 기품과 친절, 신뢰를 갖춘 어질고 선량한 분으로 기억된다. 시집도 세 권이나 발간했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집 앞에서 교통사고로 잃고 거의 실신상태의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후 시름시름 앓다가 고인이 되셨다. 내가 1995년에 시집 <봄의 설법>을 발간해서 권 시인께 보내드렸더니 직접 그린 그림이 담긴 엽서를 보내주셨다.

산, 새, 꽃, 구름, 해와 달, 오래된 고가(古家), 거기 들어앉아 시를 쓰는 나를 그리셨다. 권국명 시인의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내 이대로 살다가
어느 푸르른 가을날
국화꽃 피었다가 진 자리같이
아무 흔적 없이 가서,

​바람 불고 비 오는
봄이 돌아와
마른 그루터기에
국화꽃 새순이 돋아나면,

​그 매운 그늘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맑은 향기로 돌아와 살고 싶네.
아, 오늘이 그날인 듯 살고 싶네.
                                                         -권국명의 시 ‘오늘이 그날이듯’ 전문

권국명 시인

李東洵 詞兄께
詞兄의 시집 “봄의 설법”을
큰 감동으로 배독(拜讀)하였습니다.
숨어 사는 이의 고담(枯淡)한 모습이
정신(精神)의 한 높이로 이어져
그동안의 적조함이 오히려
낯설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날로 외로움이 더할 뿐입니다.
詞兄의 건필(健筆)이 부럽습니다.
더욱 좋이 계시소서.
1995년 5월 26일
대구 두산동
權 菊 命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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