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모든 장르 두루 섭렵 ‘최광렬’을 기억하십니까?

최광렬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보낸 엽서 앞면

최광렬(崔光烈, 1925~1995)이란 분이 있었다. 시, 소설, 희곡, 문학평론 등 문학의 모든 장르를 두루 헤집고 다니며 글을 썼다.

경북 포항 출생으로 대구사범, 동국대를 중퇴했다. 1951년 전쟁 시기 대구에서 발간되던 잡지 <전선시초>에 평론 ‘전쟁과 시’를 발표했고 이후 ‘한국 비평문학의 빈곤을 말함’으로 당시 피난지 문단의 반향을 일으켰다.

<꽃과 전쟁>, <천사와 허깨비의 합창>, <한국현대시 비판>, <비평언어와 우주의식> 등의 문학평론집을 발간했다. 특히 화제가 된 것은 <개인잡지>란 이름의 부정기간행물 잡지를 발간해서 거기에 자신의 시, 소설, 희곡, 평론으로 가득 채웠다.

최광렬이 3회까지 낸 <개인잡지> 표지

오로지 자비로 발간하던 이 잡지는 1955년, 1963년, 1966년 등 도합 세 차례나 내었다. 물론 팔릴 까닭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시도는 문단의 조롱도 받았지만 냉소와 비아냥거림 속에서도 신선한 도발이라는 그런 평가도 있었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1인잡지로는 유일하다. 곧 중고서점으로 쏟아져 나와 서가를 채웠는데 1970년대 나의 대학원 재학시절, 고서점에 가면 최광렬의 이 책이 너무도 흔하게 흘러 넘치다시피 했다.

최광렬 시인

대구상고 국어교사로 재직하며 박봉의 월급으로 어찌 이런 적극적 활동을 펼쳤는지 그런 모습이 참으로 놀랍고 신비스럽다. 부인이 볼 때는 정신줄을 놓은 것으로 보았으리라.

하지만 그런 책들은 이제 보존가치가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문학인으로 인정을 받으며 신문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이름 없는 잡지의 주간 등을 거쳤다. 그의 저서나 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최광렬의 글은 전쟁을 겪은 1950년대의 반성 없는 시대, 타락한 사회성에 대한 매서운 비판과 독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궁극적 방향성은 뜻밖에도 너무 소박하고 보수적 가치의 표방이었는데 주로 민족적 전통의식의 탐구에 대한 주장이다.

꽤 많은 글을 쓰고 책을 발간했지만 방향성은 집중되지 않고 거의 전방위적 확장이었다. 맹목적 불만과 분노와 비판이 마구 뒤섞인 그런 쌍칼을 마구 휘두르는 필봉으로 사람들은 그를 일러 광렬(光烈)이 아니라 미칠 광(狂)짜 ‘광렬(狂烈)’이라 빈정거렸다. 말하자면 문단의 돈키호테였던 셈이다. 문단의 이단자(異段者)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누구와도 친밀한 교류를 하지 않았지만 대구 출신의 비평가 김영무와는 정을 나눈 듯하다. 왜냐하면 김영무의 회고록에서 최광렬과의 오랜 교류 추억을 읽을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내가 시집을 발간해서 보냈을 때 선생은 뜻밖에도 엽서답장을 보내주셨다. 그 짧은 글에서도 까칠한 볼멘소리를 감지한다. 오늘은 1950, 60년대 문단의 고립적 비평가로 문학의 모든 장르에 두루 간여하고 간섭하며 폭포같은 잔소리를 쏟아내던 아주 독특한 풍모의 전방위적 문학인 최광렬 이야기를 소개했다.

최광렬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前略
두 분의 시집을 잘 받았습니다.
꼭 같이 연상심리의 소재가 매우 독특한
언어의 기교를 볼 수 있습니다.
언어의 이러한 심상의 특이한 발견들은
그런대로 개성적이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사무치는 전인적(全人的) 고뇌가
무엇으로 승화되어야 할지…
그런 몸부림도 되새겨볼 일이라 느낍니다.
두 분의 꾸준한 성장을 바랍니다.

1975년

崔 光 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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