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바다물결 거센 요즘 나기철 시인 잘 지내오?”
제주에 가면 늘 즐겨 찾는 숙소가 있다. 서귀포 중문의 H파크텔인데 그 높은 층에서 바라보는 바다 전망이 참 좋다. 양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을 끼고 있으며 그 사이로 선연한 수평선이 길게 걸려 있다. 아련히 범섬과 형제섬도 보이고 맑은 날은 마라도의 윤곽도 아스라히 보인다.
그런데 이 숙소의 위치가 바로 중문에 주둔하며 지역의 ‘빨갱이’를 남김 없이 소탕하고 처단한다던 서북청년단의 합숙소가 있던 곳이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나는 망연히 바다를 보며 아름다움에 찬탄했다. 그 파크텔 앞 인도에 서북청년단 숙소가 있었다는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새삼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주를 단지 피상적으로만 알고 찾은 일반관광객들에게 제주의 비극은 뜬금없는 그늘이다. 그들은 널리 알려진 명소만 찾는다. 제주가 100년 안쪽에서 겪은 몸서리쳐지는 비극성 따위엔 아랑곳 없다.
그런데 이 제주의 역사적 비극은 줄곧 관심 가져선 안될 금단의 영역이었다. 이 금단의 영역을 과감하게 다룬 한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소설가 현기영이다. 제주 출신 문인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에게도 4.3사건 테마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짐작만 하면서 작품의 중심부로 끌어오지 못했다. 시인으로는 김광협, 양중해, 문충성, 김시태, 한기팔, 문무병, 김광렬, 나기철 등이 있고 소설에는 현길언, 현기영, 오성찬, 최현식, 한림화, 평론에는 박철희, 김시태, 김영화, 김병택 등이 있다.
제주출신의 재일동포작가 김석범이 어린 시절에 겪은 4.3의 기억을 더듬어 장편소설 “화산도”를 썼다. 육지 출신의 시인 이산하가 장시 “한라산”을 발표하고 심한 박해를 받았다.
1980년대로 접어들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단연 제주로 관심을 집중시켰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많은 조명을 받았지만 박해도 심하게 받았다.
내가 지난 197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했을 때 당시 문화부장이 김광협 시인이다. 그런 인연으로 김광협 시인과는 몇 차례 만나서 식사와 환담도 나누었다. 그의 소개로 오성찬, 현길언 등도 만났다.
문충성 시인은 제주에서 여러 번 만났다. 소탈하고 시원스런 성격이었지만 늘 제주의 외적 미감만 노래하는 시를 썼다. 현기영은 창비에서 자주 만났고, 1987년 신동엽문학상을 받을 때 함께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문단선배이다.
제주의 젊은 시인들로는 김광렬, 나기철 등이 있는데 늘 새로 펴낸 책을 보내오고 근황도 알려준다. 모두 열심히 활동하는 시인들이다.
내가 시집 “가시연꽃”을 발간했을 때 책을 받고 보내온 나기철의 엽서가 눈에 띤다. 앞으로는 제주에 가더라도 제주가 겪은 근대사의 시련을 생각하며 그곳을 다니는 분별 있는 여행자가 되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불구적 여행이 될 뿐이다.
李 東 洵 선생님,
보내주신 시집
“가시연꽃” 잘 받아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마왕의 잠'(동아일보) 스크랩이
제 선반 위에서 30년 가까이 잠들어 있군요.
백석의 시편들 묶어
저희에게 보여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백석, 용악, 지용, 용래…
이런 시인들이 새삼 생각키우는 때입니다.
제주 바다 물결이 세차군요.
그럼 총총.
2000년 1월 18일
나 기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