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본래 혼자 모색하고 궁리하고 추구하며 이룩하는 것 아닌가?”

송재학 시인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대구는 예로부터 소설보다는 시인이 훨씬 많다. 고전시대로는 서거정 선생을 들 수 있으나 근대로 접어들어서는 상화, 고월, 목우 등 세 시인이 대표적 존재로 우뚝하다.

그들과 교유하고 그들을 만나러 많은 시인들이 대구를 오고 갔으니 공초 오상순, 무애 양주동, 육사 이원록, 신석초 등이 그들이다. 6.25전쟁 시절에는 서울 시인들이 대거 대구로 내려 와서 피란살이 했는데 ‘문총구국대’를 조직하고 실제로 종군했다. 지훈 조동탁, 목월 박영종, 구상 등을 손꼽는다. 청마도 50년대 초반 대구에서 살았다.

비록 중심부 시인은 아니었지만 이설주, 이효상, 이윤수 등도 대구 토박이 시인이다. 그 후속세대로 신동집, 김춘수가 있다. 서로 대립 갈등했던 가장 대표적 경우는 목우 백기만과 청마 유치환이다. 청마는 특히 질투심과 공명심이 강해서 선배였던 백기만의 가슴에 상처를 많이 주었다. 청마는 무슨 문학상을 자기가 받으려고 지역선배 목우 백기만을 끝까지 소외시켰다. 그 때문에 목우는 크게 상처 받고 혼자 쓸쓸히 살다가 가난과 병으로 돌아갔다.

그 후속세대인 김춘수, 신동집도 둘 사이가 편하지 않고 늘 신경전을 펼쳤다. 서로 주도권 다툼의 양상을 드러내며 지역신문 칼럼으로 상호공격을 시도했다. 1960년대 이후 배출된 대구시인들은 김춘수 계열, 신동집 계열로 나뉘었고 그것이 오늘의 번잡한 대구시단을 이루었다.

주도적 분위기는 모두 몽상적, 내면적 특성으로 역사, 현실, 사회, 민족 등에 관심 갖는 시 창작은 늘 미미한 존재였다. 거의 대부분 김춘수, 신동집이 뿌린 스타일이 싹 트고 자라서 숲을 이루었고, 표면적으로는 번성한 듯 보일 뿐이다.

그리하여 대구시단은 시인의 숫자는 많아도 내실이 없고 늘 비현실의 세계에서 언어적, 감각적, 몽상적 기류를 즐길 뿐이다. 그러니까 자족적, 자기도취적 분위기에 안주하는 그런 경우를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과거 상화, 육사가 이 지역에 끼친 씨앗은 거의 소멸되었고 있더라도 그 싹은 파리하다.

60년대 후반, 대학 국문과에 입학해서 내가 배우고 겪은 문학적 환경은 전적으로 김춘수 시인의 터전이었다. 대학의 지도교수였으니 그 핵우산의 그늘에서 나는 가련한 하나의 홀씨였다.

하지만 김수영을 읽으면서 생겨난 가슴 속 반란은 은밀하고 응큼하고 무엄하게도 스승 김춘수 스타일에 대한 부정이다.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긴 하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역사, 현실, 사회의식을 관심 갖고 담는 것을 한없이 거부하며 불순하게 여기는 그런 가르침에 늘 반란의 꿈을 혼자 꾸었다.

그러니까 나의 위상이나 존재감은 언제나 문단조직에 어울리기를 저절로 싫어하고 스스로 고독과 고립을 선택했다. 현재 대구의 그 어떤 문단조직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런 지 오래 되었다. 그 왁자지껄한 어울림이 싫은 것이다.

시는 근본적으로 혼자 모색하고 궁리하고 추구하며 이룩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삶을 선택하게 되니 후배시인들이 나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대학시절부터 유난히 따르던 후배 문청 하나가 마침내 시인이 되어 이름을 빛내고 있다.

경북 영천 출생의 송재학(宋在學, 1955~ )이다. 그는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을 열었다. 진료 중에도 늘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며 시쓰기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시의 스타일은 김춘수, 신동집을 아우르는 그런 분위기인데 그들보다 훨씬 더 깊은 언어와 내면세계로 침잠하는 지향을 보여준다.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 빛과 싸우다”, “진흙 얼굴”, “내간체를 얻다” 등 반짝이는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시집을 연속으로 발간했고 큰 문학상도 여러 개 받았다.

어엿하게 성장한 후배시인의 모습이 듬직하다. 형님으로 호칭하며 진지한 표정을 짓던 그의 문청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1977년에 받은 송재학의 엽서가 지금 다시 읽어도 재미있고 상큼하다.

송재학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쓴 엽서

달마(達磨)가 성내는 것을 그린다는 게
우습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날 두 시에 보이지 않더군요.
월월산산(月月山山)일 때
큰 스님은 소멸을 극복할까요?

어려운 이야기라서
엽서(葉書) 띄웁니다.

1977년 5월 1일

송 재 학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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