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창, 한미군사협력·민군관계 가교 ‘큰 역할’

모교 봉화고교에서 후배들에게 특강 중인 김재창 장군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김재창은 육사 18기로 조선 건국의 원훈 정도전의 고향 봉화 출신이다. 봉화는 육지의 고도라 할 만한 산골이다. 김재창은 그 시골에서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합격하고 나서 다시 시험을 치러 육사에 온 수재였다. 졸업 후 다시 서울대 전자공학과에서 위탁 교육을 받고 육사 교관이 되었다.

과기부 장관을 지낸 오명 박사가 사관학교 동기이며 서울 공대 전자공학과 동문인데, 오명과 같이 교수로 남지 않고 야전으로 나가 대장이 되고, 예편 후에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김재창 국방부 정책실장은 영어가 훌륭해서 4대에 걸쳐 국방장관 통역을 했던 김삼곤 박사도 탄복해 마지않았다.

중령 시절 한미야전사 유병현 장군 밑에서 한미연합사 창설의 밑거름을 그렸다. 여기서 길러진 장군들이 후일 하나회가 정리된 후 국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정린도 그 하나다. 준장 시절 전군을 살펴보는 보안사 보안처장을 지내는 독특한 경험도 했다.

6군단장을 지내며 김재창은 사단장들을 상세히 지도했다. 여기서 지도를 잘 받은 사단장은 후에 군사령관에까지 올랐다. 국방부 정책실장 시절 칼로 베는 것 같이 예민한 조성태 국장도 잘 거느렸다.

이종구 장관, 권영해 차관, 김재창 정책실장, 조성태 정책기획관은 당시 최고의 팀이었다. 이종구는 경북고 선배인 노태우에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종구는 하루에 한 시간은 자기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머지는 차관 이하가 뒷받침해서 국방부는 잘 돌아갔다. 어디에도 있기 어렵고, 앞으로도 어려운 완벽한 호흡이었다.

조성태 국장은 명료한 장관의 지침을 받아 장관에 직보하며 차관, 실장에 간기보고만 올렸다. 권영해 차관, 김재창 실장은 이를 양해했다. 당시 국방부 정책실 진용은 최고였다. 김인종, 유보선, 김태영, 한민구, 정승조가 여기서 나왔다. 김재창은 연합사부사령관으로 권영해 장관과 같이 한미 군사관계의 맥락을 잡았다.

예편해서 조지아대학의 엔디코트 박사와 함께 동북아 제한적 비핵화 지대 운동에서 활동했는데, 미국만이 아니라 러시아, 중국, 일본 아르헨티나, 핀란드, 터키 등의 다양한 나라의 학자들과 교유했다. 국방부 정책실에서 실장으로 모시던 후배들이 전적으로 지원했다.

군사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인들은 민간학자들을 헌병 백차로 호위하는 파격적 대우에 놀랐다, 연합사 부사령관 시절 부참모장이었던 이석복이 같이 하였다, 엔디코트 박사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며, 대전 우송대학에는 ‘주소만 한국이고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솔브리지대학이 있다. 김재창은 홍성태의 KRIS에도 깊이 간여해서 민간학자들에 감명을 주었는데, 이는 건전한 민군 엘리트 이해와 협력의 전형이다.

김재창은 하나회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신구 엘리트의 중간 역할을 충분히 했다. 탁월한 능력과 독실한 크리스찬의 겸손한 인품으로 선후배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중장 시절 후배에도 반드시 경어를 사용했다, 해군 공군에서는 통상이지만 준장도 대령에 ‘하게’를 하는 육군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2010년 6월 24일 6·25전쟁 6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존 틸럴리 전 한미연합사령관(오른쪽)과 김재창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좌담했다.당시 한미안보연구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던 두 예비역 4성 장군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의 연기는 한반도의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사진 로스앤젤레스=동아일보 신치영 특파원>

김재창은 백선엽, 유병현 등과 함께 변동기의 한미군사협력관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랜 동안 해오던 한미우호협회장을 지금 연합사 부사령관 출신의 28기 김병관이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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