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은 전쟁에만 충실…정치야심은 없었다”

생전의 백선엽 장군

고려에 무신정권이 성립했다. 정중부, 경대승, 이의방은 무신이 문신의 구박에 항의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확히는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까지 백년 동안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가 집권한 때이다.

고려 무신정권은 같은 시기 시작된 일본 미나모토 요리토모 막부幕府와 같은데 막부는 도쿠가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한국 역사에 있어 독특한 무신정권은 오래 동안 계속된 일본의 막부 체제와 비교하여 큰 의미가 없었다.

기간 중 몽고가 침입하였다.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여 29년 동안 항전을 계속하였는데 고려인의 결연한 의지는 완도에서 전멸할 때까지 항전한 삼별초가 대표한다.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고려의 전력을 모은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이는 무신정권이 몽고와의 극심한 항쟁 가운데서도 민중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 선비가 다스렸다. 숭문천무崇文賤武로 철저한 문반우위였다. 4군6진을 개척한 김종서도 본래 문신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이순신은 무과 출신이었다. 그러나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의 지원을 받았기에 발탁된 것이다.

조선은 제대로 된 방어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세계 제국 명明에 대한 사대事大만이 관심이었다. 삼전도 굴욕은 조선이 국방 측면에서 형편이 없는 체제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선비들은 명明에 재조再祚의 은혜가 있음을 강조할 뿐이었다. 효종의 북벌론도 가능하지 않은 공리공론空理公論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조선의 문반 우위의 전통에 철저한데다가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여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에 철저했다. 6.25 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와 직접 상대한 것이다. 자유당 정부에서 쿠데타 지도자로 옹립된 분은 이종찬 한분이나 거절했다.

이종찬은 한일합병에 협력한 이하영의 손자였으나, 일제 하 작위 계승을 거부했고 10월유신 후 유정회 의원으로 추대되었지만, 한 번도 국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정경두(왼쪽) 국방부 장관이 2019년 11월 21일 서울 국방컨벤션에서 백선엽 장군에게 손수 음식을 권하고 있다.
연합뉴스

참모총장 백선엽과 정일권은 이승만의 전쟁 수행만 착실히 보좌했을 뿐 정치적 야심은 없었다.

이승만은 특무대장 김창룡, 헌병사령관 원용덕을 권력 유지에 이용했다. 5.16이 나자 통수권을 가진 장면 총리는 수녀원에 숨어들었다. 남은 유일한 헌법기관인 윤보선 대통령의 반응은 “올 것이 왔군”이었다.

반면에 스페인의 카를로스 국왕은 “나를 밟고 가라”며 저항, 헌정을 수호했다. 윤보선과 최규하는 그만한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군정이 두번이나 성립한 데에는 민간인의 호헌정신이 뚜렷하지 않은 탓이 크다. 심지어 옐친의 용기가 보수파와 군의 쿠데타를 저지하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군부를 무시·홀대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 정확히는 군부를 무시한 것이라기보다 정체성과 단결력을 갖춘 사관학교 특히 육사 출신 무시하기다. 3사 출신과 학군 출신에도 훌륭한 엘리트 군인이 있다. 하지만 이 정부의 군인사는 균형을 잃고 있다. 사관학교는 무엇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집단보다 앞서며 군의 정통성을 나타낸다.

미국과 영국은 상무정신尙武精神과 군사체제가 국가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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