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 백선엽 장군 오늘 1주기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오늘 1주기를 맞는 백선엽 장군은 6.25 당시 다부동전투에서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는 필사의 결의로 임하였다.
이때 1920년생인 백선엽이 서른살 때다. 그는 대장을 7년 반 달았다. 참모총장, 야전군사령관, 연합참모본부 총장이었다. 채병덕이 총참모장(당시 참모총장은 국방부에, 각군 수뇌는 총참모장이라 불렸다)에서 물러나고 정일권이 참모총장이 되었으며, 이종찬이 정치파동으로 물러나자 백선엽이 뒤를 이었다.
1953년 2월 야전군이 생겨나며 초대 야전군사령관이 되었다. 1955년 예편 직전에 합참의장격인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되었다. 예편 후 주캐나다, 주프랑스대사 등을 지냈다.
미군 장군에 백선엽은 맥아더나 리지웨이 같은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이었다. 해리스 대사가 백선엽 장군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 것이 모친이 일본인이어서 동양 예법에 익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백선엽은 2020년 백세를 앞두고 서거했다. 한 인간으로서 군인으로서 모든 영광과 명예를 얻은 일생이었다.
戰功으로 최종 평가되는 군대에서 백선엽은 최고다. 보병사단으로 미군 기계화사단을 앞선 평양 입성은 백미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다. 당시 미군 장군들은 제2차대전 역전의 戰士들이었다.
국군은 서른살의 팔팔한 청년장교들이었다. 백선엽은 1920년생, 장도영은 1923년생이었다, 6.25전쟁에서 이들만큼 전공을 세우지 못한 박정희도 1917년생이었다. 이들 청년 장군들이 한국을 지켜낸 것이다. 1875년생인 이승만 대통령은 할아버지 격이었다.
김석원, 김홍일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 시대가 맞았으나 한미연합박전에 서툴렀다. 따라서 초기 전투 이후 군을 후배들에 물려주었다.
장군만이 아니다. 백마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전투에서 수많은 청년이 죽어나갔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무수한 정영(精英)이 사라진 제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재판이었다.
영화 <1917년>은 이를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도 전사를 비롯해 부상 및 실종이 백만에 달했다. 1951년과 1952년의 고지전에서 많은 초급장교가 죽어나갔다. 지금도 용사들의 유해를 찾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6.25전쟁에서 미군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조국을 지키려는 국군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6.25전쟁보다 10여년 지나 시작되어 1975년 종식된 월남전과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다. 미군은 5천억 달러의 최신 무기와 장비, 2만7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12만명을 냈다. 돌이켜 보면 월남전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키신저와 맥나마라 같은 책상머리 전략가(armchair strategist)가 지도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이들이 전략을 만든 핵전쟁도 제한전쟁도 아닌, 전혀 낯선 인민해방전쟁이었다,
영면의 터로 호국원 병사들 묘지를 택한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 전술지휘관이 아니라 주장(主將)이 되었어야 했다.
요새 수많은 희생을 한 선배들을 본받아야 할 장병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어 걱정 된다. 특히 간부들의 성추문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이제는 장군도 50대다.
군사교육도 많이 받았고 한미연합훈련을 통해 미군들에게 작전술도 많이 전수받았다. 여러모로 원숙해질 나이다. 민간인들과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백선엽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지만 같은 비중의 주목을 받지 못한 김종오, 한신, 이병형 장군도 후배들은 깊이 공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