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부르는 분들께

정경두(왼쪽) 국방부 장관이 2019년 11월 21일 서울 국방컨벤션에서 백선엽 장군에게 손수 음식을 권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친일파는 조선말 친청파. 친로파 등과 더불어 조선의 살길을 모색하던 김옥균, 박영효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친일파는 실패했다.

나라를 망해먹은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등 을사오적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들의 자손들이 대한민국에서 번영하는 것도 안 된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나라를 다시 찾는 방법을 나라 안에서 찾기 어려웠고, 방법은 외국에 나가는 방법뿐이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었고 청산리 대첩 등이 이들을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1904년 미국으로 가서 해방되기까지 40년을 미국에 머물렀다. 김구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 후 상해로 망명했다. 일제 통치 하에서 살아간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온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내내 일본의 권력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종인의 조부 김병로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중앙일보 홍석현의 부친 홍진기와 국회의장을 지낸 채문식 등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식민지 관료가 되었다. 이들은 친일파라기보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엘리트였다.

부일배(附日輩)도 생겨났는데 이들은 심부름꾼이었다. 종로 경찰서 사찰과 노덕술이 대표적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들도 나라를 이끌어가는 도구로 보아 채용하자 반민특위가 반발하고 결국 해산했다.

이응준, 김석원 등은 본래 대한제국 무관학교 학생이었는데 나라가 망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서 26기, 27기로 임관,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1930년대에 홍사익, 이형근 등이 입교했고, 1940년대에 만주군에서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 등이 편입했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가 창설되자 이들은 광복군이 군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고 하며 근신하며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참여한다. 이들은 친일군인이 아니라 일본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군직을 택한 것이며, 대한민국은 이들의 군사 지식과 경험을 활용한 것이다.

일제 통치는 미나미 총독 시대에 특히 엄혹했다.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런 가운데 김성수, 여운형이 식산, 교육, 언론을 중심으로 다음 세대를 키우며 민족을 이어갔다. 이들이 일제에 협력했다고 보는 것은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사고이며, 무책임한 말이다.

김성수를 빼고 고려대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백낙준을 제외하고 연세대를 논할 수 있는가? 이들을 친일파라고 지칭할 수 있는가?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러시아군 중장이었던 핀란드 대통령 만넬하임을 친로파로 부르고, 영국군 장교였던 워싱톤을 친영파로 부를 것인가? 이제 그런 유치한 소리는 그만두자.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