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안보정책의 산파’ 홍성태와 전략문제연구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홍성태는 육사 14기생으로 목포 출신이다. 육사 졸업 후 서울대 사학과를 다녔고 전사 교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그는 별명이 기동전의 대가 ‘롬멜’이었다. 홍성태는 작전술을 강조했는데 기동전을 기본으로 삼았다. 현대전의 원형인 프러시아군과 독일군을 깊이 연구했다. 독일 육군대학 유학 시절 아우스테르리츠전투 등 나폴레옹 전사의 전장을 훑었고, 만슈타인의 프랑스 돌파를 공부하기 위해 서부전선을 찾았다.
독일군을 연구하는 기풍은 독일군사관학교를 나오고 육군대학을 나온 김관진, 김태영, 하정열, 유제승 등에 의해 지속되었다. 이들은 미국 육군대학과 국방대학원에서 공부한 장교들과 함께 군의 중요한 흐름을 대표한다.
홍성태는 “전사 공부는 승전보다도 패전에서 교훈을 찾을 것이 많다”는 것을 강조한다. 1951년 3군단이 중공군 운동전에 참패한 현리전투를 되씹기 위해 인제 오도치고개를 찾는다. 항상 도상 연구를 넘어 현장에서 전황을 호흡하는 것을 강조한다.
예편 후 동기생 이종구, 박정기의 권유에 따라 한국전략문제연구소(KRIS)를 창립했다. 당시는 민간연구소에도 정부가 보조금을 주었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지원을 받았다. 홍성태를 생도 시절부터 또는 육군대학에서 따르던 후배들이 큰 도움을 주었다. 연구비 보조는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 매년 30%씩 삭감되다가 3년 후 전액 폐지되었다. KRIS만이 아니라 정부보조를 받는 민간연구소 전반에 적용되는 정책이었다.
KRIS에는 각 분야 일류의 인물들이 참여했다. 백선엽, 유병현, 김점곤, 민병돈 등 장군과 안병준, 이상우, 김달중, 유세희, 김동성, 현인택 등 학자들이 참여했다. 연세대 문정인 교수도 있다. 참여자는 대부분 보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홍성태는 좌우를 통틀어 넓게 인재를 찾았다.
이들을 종합하는 홍성태의 사회는 일류였다. 토론 전반을 녹취하여 요약을 덧붙여 국방부에 전달했다. 조성태, 김동신, 이준 국방장관이 큰 도움을 받았다. 홍성태는 중장 이하는 그냥 장군이라 부르면서도, 大將은 반드시 대장이라고 불렀는데 홍성태 나름의 독특한 군사문화였다.
KRIS는 이후 민간 전략연구소의 전형이 되었으며 1990년대 정부에 앞서 공산권 연구의 효시가 되었다. 1953년 정전회담 중공측 대표였던 지에팡(解方)이 참여하여 백선엽과도 만났다. 둘은 서로를 朋友라고 불렀다.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미국의 네오콘을 대표하는 월 포위츠를 불러 부시 행정부의 안보 흐름도 읽었다.
KRIS의 기여는 여느 연구소와 차원을 달리했다. 이는 미국 정계의 흐름에 넓은 정보를 가진 김동성, 현인택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KRIS의 활동과 기여는 요새 삼성이나 현대에서 경영하는 연구소에서도 힘들 것이다.
KRIS는 육사 출신 모두의 자산이 되었다. 이제 홍성태가 모았던 수준과 차원의 학자, 예비역 장군을 모으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는 경제인, 기업인도 모을 필요가 있다. 국가 전략의 이해와 구상에는 군인, 학자와 더불어 기업인이 합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홍성태의 연구소 경영은 열정이 기본이었지만 드문 행운도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