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 국방장관’ 김병관·김관진·김태영의 ‘반세기 우정’

김태영(왼쪽)과 김관진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대한민국 실록> 저자] 김병관이 작전술에서 특출함을 과시한 데가 있었다. 육사 4학년 때 대대장 생도로 중대장 생도들과 작전을 구상하고 개념을 안출했다. 중앙돌파 후 각개격파였다. 결과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승리는 동기생과 후배들에게 전술가로서 김병관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병관은 육사 수석 입학, 수석 졸업이었는데 이는 11기 김성진 이래 드문 기록이었다.

김병관이 연합사 부사령관이 된 것은 연합사령관 벨 장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벨은 중동전 경험과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마치고 한미연합군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당대 최고의 장군이었다.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제32대 김병관 사령관(왼쪽) 이임식 겸 제33대 김태영 사령관 취임식이 2006년 11월 17일 오전 연병장에서 거행됐다. <사진 강원도민일보>

CPX에서 1군사령관 김병관을 주목하고 그를 부사령관으로 요청했다. 작전술에서 한미 최고의 장재들이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김재창이 서울대 전자과에 합격하고서도 육사에 왔듯이 김병관은 서울대 화공과에 다니다가 육사에 왔다.

김관진은 독일 육사 유학 후 임관해서 동기생도 잘 몰랐는데 보병학교 전술학 교관을 하며 독일군의 전통적 교수방법을 소개하여 후배들로부터 ‘장래 군의 희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김태영에 이어 장관이 된 김관진은 ‘선 조치 후 보고, 적의 공격원점에 응징타격’이라는 단호한 작전지침을 내렸다. 이는 가장 효과적인 대북 억제력이었다. 북한이 김관진을 두려워해서 전사들의 총검술 목표로 삼았을 정도였다.

김관진(왼쪽)과 김병관

김태영도 독일 육사를 나왔는데 영어가 훌륭해서 합참의장, 국방장관으로 통역 없이 미군과 자유롭게 소통했다. 이명박이 김태영을 수방사령관으로 발탁했고 그 이후 장관에까지 진출했다. 김태영은 전방 방어, 향토방위, 동원 업무가 결부된 22사단장 경험이 수방사령관 수행에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김병관, 김태영은 경기 중고교 시절 동창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간에 선후배 예의는 철저히 지켜서 셋을 모두 잘 아는 장군도 이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김병관, 김관진, 김태영의 지도를 받은 많은 후배들이 군을 이어가고 있어서 마음 든든하다.

자이툰부대 황의돈의 파발마 작전은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 당시 현장지휘는 부대장이 했지만, 총괄 지휘는 김종환 합참의장이 서울에서 했다. 아르빌은 쿠르드족 내분으로 미국군 영국군도 가기를 꺼려하던 지역이다.

참여연대 등이 반대하던 출병인데 자이툰부대의 활약으로 평화를 심으러 왔다는 임무를 훌륭하게 마치고 희생 없이 무사히 돌아왔다. 1999년 동티모르에 상록수부대 파견도 이 뒤를 이은 것이다. 백선엽의 6.25전쟁 세대와, 채명신의 월남전 세대에 이어 유병현의 한미연합사 창설로 국군은 제3세대로 접어들었다. 오늘 세대는 그 뒤를 잇는 세대다. 선배들을 치밀하게 공부해서 잘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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