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장군 “일화가 전설이나 신화로 남아있는 마지막 세대”

한신 감사원장가운데)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오른쪽은 훗날 경호실장을 지낸 차지철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신은 일본서 중앙대학교를 다니다가 군에 끌려간 학병 출신이었다. 일제하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상당히 유족한 집안이었다.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넘어간 인원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일본군에서 복무했다. 그 인원은 초창기 우리 군의 중요한 자원이었다. 참모총장만으로도 장도영, 김종오, 민기식, 김용배, 김계원 등을 배출했다. 한신은 6.25전쟁 중 전투를 제일 잘한 연대장으로 운위된다.

한신이 사단장을 할 때는 자유당 부패가 극심할 때였다, 한신의 모토는 ‘장병 제일주의’로 “잘 먹이자”였다, 비행기에 헌병을 데리고 다니다가 부대를 급습해서 1종 식량 창고를 점검하여 이상이 있으면 부대장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압송했다. 한신은 정군을 위해 1955년에 나온 육사 1기생(나중 11기)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한신 장군

한신이 육사 출신에 얼마나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서우인 등에 의해 많은 일화가 남아 있다. 5.16 후 군정기간에 한신은 감사원장을 맡았다. 박정희는 동기생 한신의 결백에 전폭적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한신은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남지 않고 군으로 돌아왔다.

한신은 야전군사령관 이후 합참의장이 되었지만 8.18 이전에 합참의장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한신이 합참의장 시절 국방차관으로 외무부에서 최광수가 왔다, 한신 합참의장은 최광수 국방차관을 정성으로 대우했는데 현역군인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최광수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놓고 기다렸다. 그때까지 국방차관은 대장이 되지 못한 중장이 예편해서 오는 것이 통상이었다. 그것도 대개는 법조경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최광수는 엘리트 외무공무원이었는데 나중 외무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데서 보듯이 정상급 관료였다.

뒤에 합참차장에 대장이 보직된 경우가 있었는데 서열상 차관의 위였다. 직위와 의전서열을 분간 못한데서 오는 혼란이었다. 대장이 장관급 대우를 받는 것과 별개로, 차관이 국방부 2인자라는 것이 제대로 잡혀진 것은 권영해 국방차관 시절이다.

미국 국방부에서 합참의장은 장관, 부장관(Deputy Secretary), 각군 장관, 차관(Under Secretary) 다음이다. 한신은 국방부 문민화를 이해하고 추진한 드문 장군으로 기억된다.

한신은 <참군인>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는데 원고의 대강은 본인이 쓰고 부관을 지낸 조성태 등이 덧붙였다. 조성태 부관이 차량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났다고 보고하는데 물의 깊이가 얼마나 되었냐고 물어, 파악하지 않은 부관이 낯이 붉어지자 장교는 당황하지 말고 앞뒤를 자세히 파악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한신은 육사 출신의 영재를 부관으로 삼아 하나하나 가르쳤다.

한신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이종찬과 함께 군의 사표로 통했다. 이종찬이 난초라 한다면 한신은 면도날이었다. 두 분 다 우리 군의 전설이다. 한신은 장량張良, 소하蕭何와 함께 한 고조 유방劉邦을 보좌한 파초대장군 한신(破礎大長軍 韓信)에도 비유된다.

한신은 당시의 일화가 전설이나 신화로 남아있는 마지막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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