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육사혼의 정화’ 서우인 전 육사교수···전두환·강재륜과 11기 동기
육사 11기 서우인 전 육사교수가 10일 90세로 별세했다. 그는 1932년 안동에서 출생해서 한국 현대사를 응축한다. 가장 어려운 시기 일제를 겪었다. 6.25가 터지자 고등학생으로 군에 입대해 호국군 소위가 되었다가 1951년 보병학교가 생기자 다시 간부후보생 소위가 되었다. 1952년 1월 육군사관학교가 창설되자 1기로 입교했다. 11기는 후에 기칭 통합으로 된 것이다. 교장 안춘생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였다.
서우인은 일제말기 소학교, 중학생 때는 혼란과 좌우익 대립을 지켜보았다. 서우인은 사관학교에 가기 전 이미 어른이었다. 육사 동기 김성진, 강재륜 등과 함께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전사과 교관이 되었다.
5.16쿠데타가 터지자 동창회에서는 성격을 의심하여 서우인을 대표로, 북극성 동창회 설립을 권고했으며 당시 야전군사령관인 이한림 장군에 파견했다. 이한림은 서우인이 소위 시절 점호를 취하는 것을 보며 육사생도가 어떻게 자랐는가를 지켜보았다. 육사를 접수한 혁명군의 영향으로 생도가 혁명지지로 돌아서자 5.16은 쿠데타에서 혁명으로 변하였다. 김종필에 의해 중앙정보부가 생기자 동창회는 서우인을 중정에 파견해 최고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국을 지켜보았다.
그는 월남전에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귀국 후 육군본부 예비군 참모부 과장이 되었는데 후임이 하나회 핵심 이종구다. 하나회가 서우인에 장군을 달아줄 리 없었다. 서우인은 서강대 학군단장을 끝으로 예편하고 중앙정보부 국제문제연구소에 근무했는데, 이때 전두환에게 이야기해서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이 노태우다.
육사 10기, 생도1기, 2기는 나이가 육사 11기와 거의 같다. 일제와 6.25를 거친 것도 같다. 김종필 등의 8기와도 차이가 별로 없다. 때문에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거의 같을 수밖에 없다. <육사 30년사>를 준비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동시에 정규 4년제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육사 출신은 보다 대범해야 한다.
12.12가 사태가 터지자 그동안 육사가 만들어온 가치와 전통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한 사람이 그였다. 서우인은 ‘육사혼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육사 생도는 한 시대의 꽃이었다. 단순히 육군 장교 양성기관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교관 출신은 서울대학교를 다녀서 독특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최초의 국비유학생이기도 했다. 전사과는 그 중심이 되는 학과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강했다. 여기에는 서우인의 영향이 컸다.
전두환은 축구부, 노태우는 럭비부, 이동희는 응원단, 김성진, 강재륜은 정신적 지주로 11기를 이끌어왔다. 동시에 그들은 육군사관학교 역사를 만들어왔다. 서우인은 이 모두를 끌어 모으는 별이었다. 이들은 이제 동기생으로 저승에서 같이 만나 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