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전통·문무 겸전 ‘육사’ 비난·질시보다 적극 활용을
대한민국 육사를 영어로 Korea Military Academy라고 한다. School이나 College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아카데미는 독특한 것이다. 미국 육사에서 온 것이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는 아카데미이지만, 마샬이 나온 버지니아 군사학교(VMI)는 Institute다. 군사학교가 대학의 전형인 아카데미가 된 것은 육사의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하다. 육사 규모는 단과대학이었지만 교수는 종합대학이었다.
육사 교수 유학은 초기에 미국에 제한되었다. 미국 유학이 시작한 것은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시작하면서부터다. 최상진, 최창윤, 박용옥 등이 이것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최창윤은 토플 점수가 그해 응시자 중 수석이었다. 미국 유학이 전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 중 학위를 얻지 못한 유학생은 대부분 미국에 남았다.
육사에서 유학하는 장교는 모두 학위 취득에 성공해서 돌아왔다. 경기고 출신, 서울대 상대의 변형윤은 도서관을 제외하고는 얼굴도 비치지 않는 오관치에 질려버렸다. 생도시절 럭비선수였던 임인조는 퍼듀대학에서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미국 이외 유학은 독일부터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유럽 사관학교와 같이 독일 육사는 학위를 주는 데가 아니다. 독일 육사를 다녀온 장교들이 독일 대학으로 유학하며 박사를 취득했다. 괴팅겐대학 심리학과 조남국 박사가 효시였다. 이어서 불란서 소르본느대학에서 차영구 박사, 정계섭 박사 등이 나왔다.
육사 교수부 많은 박사들이 5공이 출범하면서 이들 가운데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국보위에 참여했다가 장차관이 되었는데 전두환 시대 경제, 산업을 선도하였다. 이공계 박사는 국방과학연구소의 밑거름이 되었다. 11기 수석 김성진은 국방과학연구소(ADD)의 개척자였다. 그래서 ADD는 실질적으로 서울대 공대와 육사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육사가 군에 남긴 성취는 당연한 것이지만 학문에 남긴 성과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명 박사는 88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통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뉴욕주립대는 그를 ‘모교를 빛낸 졸업생’으로 선정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와 총리를 지낸 이홍구 교수와 1970년대 특수 간부후보생은 서울대에서 추천한 준재들로 육사와 서울대의 접점이 되었다. 육사에서도 각 기수에서 20여명의 교수요원이 서울대 위탁교육을 받았는데 경기고 등 명문 고등학교 인재들이 여기서 만나 한국에서 민군관계의 터전되었다. 육사 교수부 출신은 육군본부와 국방부 합참으로 진출해서 정잭실에 근무하고 3사관학교에도 나가 확대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육사 출신을 군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활용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과 이를 받든 정승화 교장에 의해 연수원으로 만들어졌다. 이동희 원장의 지휘와 조두현 등 교수진에 의해 훌륭하게 발전했다. 정통관료 서울시장 고건 등 고급 공무원의 높은 평가도 받은 이 제도가 하필 이동희의 동기생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중단된 것은 아쉽다. 응원단장 이동희가 만든 인재 활용의 토대를 축구부장 전두환은 활용했는데 럭비부장 노태우가 없애 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