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영친왕·이용구·노덕술·이종찬 그리고 김경천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일본 육사생도 이형근이 영친왕을 만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당시는 일본이 망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때이다.
조선을 멸망시킨 후 일본은 고종의 왕자인 영친왕을 일본 육사에 보내고 중장까지 올리며 일본 황실의 방자芳子와 결혼시켰다. 해방 후 영친왕은 바로 귀국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이승만은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다는 것이었고 양녕대군의 후손이던 이승만은 세종 즉 충녕대군 후손인 영친왕과 거리감도 있었다.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에 사관생도로 들어갔다가 나라가 망하자 일본육사에 편입된 경우로 이응준은 16기, 김석원은 17기로 졸업했다. 그들은 오직 일본인에 지지 않는다는 자세로 사관학교를 다녔다. 이들을 단순히 친일파로 폄하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중국의 장개석蔣介石도 1910년 일본육사의 전신 진무당振武堂을 나왔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해 서로 앙숙이었지만, 군사는 선진국 일본에서 배우자는 것이었다. 김석원이 성남고등학교를 설립하며 교과과목에 유도, 검도를 집어넣은 것은 일본군 장교교육에서 본뜬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 친일파에 한일합방을 건의한 일진회장 이용구가 있다. 그는 거액의 은사금을 받고 온갖 혜택을 다 누렸다. 일진회의 부화방탕과, 상대적으로 조선 민중의 참담함에 대해서는 김동인의 단편소설에 잘 그려져 있다.
부일배附日輩로는 종로경찰서 형사로 수많은 애국지사를 고문한 노덕술이 대표적이다. 조선의용군 출신의 김원봉이 북한으로 간 이유가 노덕술이 처단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뺨을 맞자 분함을 견디지 못한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들과는 달리 일본육사를 졸업하고도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이 있다. 그는 군사지식으로 명망이 높았는데 후에 김일성으로 불리웠다. 김성주가 김일성이 된 것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전설적으로 내려오던 이 김일성을 소련군이 이용한 것이다.
이형근이 군번 1번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10001번이다. 이응준을 비롯해서 많은 선배가 있었는데도 이형근이 10001번이 된 것은 일본군 출신의 대표로 인정된 것이다.
6.25 직후 해임된 채병덕에 이어 참모총장이 된 이종찬은 소좌였고, 2.4정치파동으로 해임된 이종찬을 이은 것이 이형근이다. 그들과 달리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육사에 유학했다.
일본에서 육사를 나온 사람도 적지 않지만 육대를 나온 사람은 영친왕과 홍사익 둘뿐이었다. 일본에서 육대는 프러시아 육군대학을 따라 만들어진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영친왕은 왕족이니 육대에 들어갔고, 실력으로 들어간 것은 홍사익이다.
그는 출중한 인재로 중장까지 이르렀으나, 종전 무렵 필리핀에서 연합군 포로수용소장으로 있다가 미군에 잡혀 사형 당했다.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일본군에서는 장군에게 각하의 경칭을 올렸다. 이를 따라 우리 군도 장군에 각하를 붙였다. 1968년 군인복무규율이 제정되어 각하는 대통령에게만 쓸 수 있도록 되었다. 그러나 상당 기간 습관적으로 장군에는 각하를 붙였다. 심지어 부사단장을 부각하로 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