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소망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기미 독립만세 운동은 대한민국의 연원이다. 이때 백성이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 한일합방은 한줌의 지배층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다.
을사 5적은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이다. 의병은 명성황후가 시행 당한 데 대한 유생들의 궐기였으나 기관총을 사용하는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당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된 후 일본은 병합 후 헌병과 경찰을 일원화한 헌병경찰 제도를 만들어 무단통치武斷統治의 핵심으로 삼았다. 헌병은 식민통치의 이빨이요 채찍으로 조선인에게 공포와 저주이 대상이었다.
토지 소유권의 확인과 지세 체계의 정비를 추진하였다는데 조선인은 절차의 번잡함으로 신고를 하지 않는 수가 많았다. 이 경우에 총독부 소유지가 되었다. 동양척식회사는 본격적인 토지수탈에 나섰다. 동양척식회사(동척)는 헌병과 쌍벽을 이루는 식민통치의 손발이었다.
삼일운동 이후 민족운동을 이끌어갈 영도기관으로서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가을 봉오동 승첩과 1920년 10월의 청산리 승리를 거두었으나 소련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로 말미암아 1921년 자유시(흑하)참변으로 전멸되어 항일 무장투쟁은 종언을 고했다.
일본은 조선 백성은 무력으로 눌러도 저항 못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삼일운동의 거족적 저항에 놀란 일본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을 보내며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웠으나 서울역에서 강우규 의사의 폭탄 세례를 맞아 혼비백산魂飛魄散하게 되었다.
독립선언문을 읽어본 일본 지성인들은 이러한 정신과 문장을 가진 조선 사람을 일본이 건드렸다는 것이 큰 잘못이라고 했다.
기미독립만세로 우리 민족은 깨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립되어 비로소 독립운동의 영도기관이 되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다.
통일된 대한민국의 완성이다. 북한을 빨리 수복하여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을 실현하여야 한다.
경찰이 보수단체 삼일절 집회를 금지한다고 한다. 집회가 삼일절의 민족사적 의의를 다시 생각하며 굳게 다지는 집회가 되어야 되는데 경찰의 발상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