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콜롬비아 ‘무산소 발효커피 농장’을 가다

무산소 발효한 내추럴 커피의 향미를 맡고 있는 농장주 후안과 필자.

향미고향에 대한 커피의 진한 그리움을 맛보다
전통의 ‘라 루이사’와 희귀종의 ‘카피야 델 로사리오’

커피 열매에서 씨앗을 가려내는 일반적인 과정에 산소 없이 발효를 진행하는 공정을 추가함으로써 전에 없던 향미를 이끌어낸 ‘무산소 발효커피’(Anaerobic fermentation coffee)가 세계 커피애호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300여년전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커피는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성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 무산소 발효기법을 통해 향미의 본질이 되살아나고 있다. 은은한 꽃향기에 열대과일의 농축미가 인상적이며, 초콜릿 같은 뉘앙스를 주는 에티오피아 토종 커피의 면모. 고향을 향한 한없는 그리움이 마침내 무산소 발효 커피를 탄생시킨 것이다. 콜롬비아 무산소 발효커피의 선구자로 불리는 라 루이사(La Luisa) 농장과 카피야 델 로사리오(Capilla del Rosario) 농장을 찾았다. <편집자>

[아시아엔=글 박영순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커피비평가협회장, 사진 박제니 CCA 그래픽디자이너] 인천공항을 출발해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주에 있는 작은 마을 시우다드 볼리바르(Ciudad bolivar) 에 오기까지 36시간 넘게 걸렸다.

무산소 발효를 하는 스테인리스 배럴을 살펴보고 있는 필자와 농장주 후안.

축구경기장 260개 크기의 260ha에 달하는 라 루이사 커피농장에는 봉우리가 4~5개 있다. 좋은 품질의 커피들은 고산지대에서 나오기 때문에 스페셜티 커피나무들이 자라는 밭은 산 정상을 타고 펼쳐져 있다. 30대의 젊은 농장주 후안 파블로 베레즈(Juan Pablo Velez)가 높이 4m에 달하는 스테인리스통이 거인처럼 서있는 발효창고에서 지구를 반바퀴 돌아간 나그네를 반겼다. 한번에 맥주 3000리터를 만들던 이 통을 그가 무산소 발효를 위해 개조했다.

“스테인리스 배럴은 온도와 pH를 조절할 수 있고, 탄소를 주입해 무산소 환경을 빨리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일정한 맛을 내는데 유리하지요.”

‘후안파’(그는 친구처럼 이렇게 부르기를 허락했다)는 ‘탄산침용 내추럴(carbonic maceration natural)’과 ‘더블퍼멘테이션 워시드(double fermentation washed)’ 커피를 각각 생산하고 있다. 탄산침용은 탄소 주입을 통해 무산소 발효 환경을 빨리 만들어 주면 맛이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부드러워진다. 이런 환경에서 커피 씨앗에 들어 있는 다양한 향미 전구체에 화학적 변화가 생기고, 이런 변화는 로스팅을 거치면서 기존 가공법과는 다른 맛을 연출하게 된다.

라 루이사 농장에 활짝 핀 카투라 커피꽃.

“더블퍼멘테이션 워시드는 스테인리스통에서 체리 상태로 96시간 발효하고 꺼내 펄핑(체리의 껍질을 제거)을 한 뒤 다시 통에 넣어 72시간을 더 발효합니다. 파치먼트 상태에서도 발효를 진행해서 ‘더블’이고요, 파치먼트 겉면의 점액질이 상당부분 씻긴 상태로 건조장으로 가기 때문에 ‘워시드’라는 용어를 붙였습니다.”

같은 밭에서 재배한 카투라(Caturra) 품종을 가지고 각각 탄산침용과 더블발효를 거친 커피의 맛은 분명하게 달랐다. 과일의 산미와 단맛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면서 질감이 실크가 혀에 스치는 듯한 점은 비슷하지만, 탄산침용 커피는 체리와 블루베리의 면모가 우세하며 럼과 다크초콜릿을 동시에 머금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더블발효커피는 흔히 워시드 커피가 주는 생동감이 보이고 시트러스(citrus)의 산미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면서도 딸기사탕처럼 화사했고, 후미에서는 견과류의 향미가 비쳐졌다.

1907년 후안파의 고조부가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커피나무를 심었다. 루이사는 고조모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철수나 영희처럼 흔한 이름으로 국민을 상징한다. 따라서 루이사 농장은 그 이름 자체가 곧 콜롬비아인 셈이다.

라 루이사 농장에는 80만 그루의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70%가 카투라, 20%가 콜롬비아와 카스티조(Castillo) 품종이다. 나머지가 스페셜티 커피로서 게이샤(Gesha), 우시우시(Wush-wush), 파카마라(Pacamara), 마라고지페(Maragogype), 카투로 키로조(Caturro Chirozo), SL-28, 타비(Tabi) 등이다.

멀리 메데진의 창공을 배경으로 무산소 발효커피를 추출하고 있는 호세. ‘성모 마리아를 위한 묵주의 기도’라는 농장 이름처럼 커피 밭에는 은총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최근 시즌에는 애너로빅 커피를 3톤 가량 만들었다. 한 시즌 생산량이 500톤 정도이니 비율로만 치면 0.6%에 불과하다. 하지만 애너로빅 커피의 맛이 잡히면 양을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후안파는 “온난화와 병충해 발생으로 재배 단계에서 질 좋은 커피를 만들거나 유기농 커피를 생산하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무산소 발효 커피는 향미의 품질을 높여 커피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카피야 델 로사리오(Capilla del Rosario) 농장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의 주도인 메데진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커피 농장으로 ‘카피야 델 로사리오’가 꼽힌다. 커피 투어를 할 때면 통상 숙소에서 새벽에 출발해 적어도 5~6시간 지프를 타고 험악한 골짜기들을 넘어야 하는데, 이 농장은 우버택시를 불러 10분만에 도착했다. 산 아래에서 젊은 농장주 호세 다비드 포사다(jose david posada)가 보내준 지프를 타고 로켓발사대에 앉은 조종사처럼 줄곧 눕다시피 하며 가파른 산꼭대기에 올랐다. 메데진 시내가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노을이 지면서 도심의 조명이 켜지기 시작할 때는 SF영화의 우주기지를 바라보는 듯 풍광이 환상적이었다.

카피야 델 로사리오 농장에서 커피열매를 살펴보고 있는 농장주 호세와 필자.

해발 1850~2200m에 야생의 숲처럼 펼쳐진 이 농장에는 6만5000그루의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100년 전통의 작은 커피 밭을 1988년 포사다 집안이 인수해 45ha로 불렸다. ‘성모마리아를 위한 묵주의 기도’라는 뜻이 담긴 농장 이름처럼 그의 집안에는 은총이 가득해졌다고 호세는 자랑했다. 3년전부터 젊은 호세가 본격적으로 농장을 운영하면서 개념을 확 바꿔놨다.

2020 Finca La Luisa

“품질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스페셜티 커피를 전문 생산농장으로 바꾸고 있어요. 커피애호가들을 위해 희귀한 커피를 경험하는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보고 해외에서 농장을 찾아 커피를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는 커피 밭의 일부를 체험학습장으로 운용하면서 새로운 수익의 가능성을 콜롬비아 커피재배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호세는 수단루메(Sudan rume), 파라이네마(Parainema), 라우리나(Laurina), 모카(Mokka), 리베리카(Liberica) 등 20여종의 희귀한 품종을 재배하며 농장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무산소 발효커피의 생산은 그에게는 6차 산업 전략의 일환이다.

“커피밭의 절반을 개량하고 있어 지난해에는 20톤만 생산했는데요. 절반이 커피마다 독특한 사연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커피였습니다. 무산소 발효뿐 아니라 산소를 소량 제공하며 색다른 맛을 내는 커피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커피 꽃 수정에 큰 역할을 하는 엔젤비(천사의 벌)

호세는 또 커피 재배가 친환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커피 밭에는 성모마리아의 전령인양 ‘천사의 벌(angel bee)’이 곳곳에 둥지를 틀고 부지런히 커피 꽃을 수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벌은 근사한 꿀까지 선사하면서도 침이 없어 방문자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벌집을 열고 움직임을 보는 것은 반려견을 돌보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준다. 그렇다. 카피야 델 로사리오 농장에는 애완벌이 있다.

호세는 “탐구를 사랑하는 한국 커피애호가들과 함께 나의 농장에서 여러 실험적인 일을 하면서 커피에 관한 지식을 나누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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