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커피의 뿌리를 찾아서

우리나라 커피 뿌리찾기는 커피를 즐기는 또다른 묘미가 될 것 같다. 사진은 떡잎이 나오는 커피 씨앗. 

[아시아엔=박영순 <커피인문학> 저자, 커피비평가협회 회장] 커피 문화가 그 나라의 수준을 말해 준다. 대한민국은 세계 커피애호가들에게 믹스커피를 발명했고, 바리스타 세계챔피언을 배출했으며, 해마다 커피트렌드를 이끄는 카페쇼가 열리는 나라이다. 우리의 커피 파워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인구수 세계 28위, 국내총생산(GDP)은 9위임에도 커피전문점 시장규모는 미국, 중국에 이어 세번째로 크다. 성인 1명이 마시는 커피량은 세계평균보다 3배 많다.

커피애호가들은 커피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일수록 활력이 넘쳐난다고 말하기 좋아한다. 한민족의 근면·성실함이 커피와 잘 어울린다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한국 커피의 뿌리를 추적했다.

커피를 마신 최초의 조선인으로 잘못 알려진 고종의 초상.

커피를 마신 최초의 조선인이 고종이라는 말이 퍼져 있다. 고종은 을미사변을 당한 뒤 4개월 만인 1896년 2월 11일 새벽, 당시 ‘친일파의 소굴’이라 지탄받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러시아 관료들에게서 커피를 대접받았는데, 이것이 우리 겨레가 커피를 접한 최초의 시점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10여년 앞서 경복궁에서 외교사신들에게 커피가 제공됐으며, 항간에 이미 커피가 유행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대체로 이들 내용이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3년보다는 앞서지 않은 탓에 이런 소문을 “고종 때 커피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의미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한반도에서 커피를 누가 제일 먼저 마셨는지가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100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커피시장에서 정통성과 의미 있는 스토리텔링을 갖는 것은 국가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실익을 거둘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중국만 보더라도 최근 3~4년 커피시장이 세계평균의 7배에 달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그 규모가 1000억위안(약 17조 5700억원)에 달했다. 인도도 비슷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커피 꽃과 열매. 그윽함과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마당에, “일본이 한국에 커피를 가르쳤다”거나 “일본의 커피 역사가 한국보다 200년 앞선다”는 식의 잘못된 정보가 진실처럼 퍼지는 것을 용납해선 안 된다. 한국 커피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면밀히 따지고, 그 속에서 경쟁력과 잠재력을 발굴해 세계가 주목할 이른바 ‘K커피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커피의 시작은 소문과 달리 일본에 의지하지 않았으며, 커피전문점이 문을 연 시기도 양국이 1888년쯤으로 비슷하다. 기록이 아니라 정황으로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을 따진다면 한반도가 일본열도에 비해 수백년 앞선다.

필자 박영순. 그는 커피 맛을 비평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나라 커피 역사를 정확히 규명하는 역할도 자임하고 있다. 

우리 겨레가 커피를 알기 시작한 것이, 기록에 따르면 어느덧 173년이 됐다. 윤종의 선생께서 <벽위신편>(闢衛新編)에 “스페인이 필리핀을 침략해 가배(커피)를 심게 했다”는 내용을 적은 것이 헌종 14년인 1848년이기에 그렇다. 이때 커피가 우리 땅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15년쯤 지나 커피가 마침내 조선땅을 밟는다.

철종 때 커피가 선교의 도구로 활용됐을 단서가 나왔다. 조선 천주교회 4대 교구장을 지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 신부가 1860년 3월 6일 홍콩의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커피 20kg(생두로 추정)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베르뇌 신부는 이듬해 9월에도 커피 25kg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고, 1863년 11월에는 요구량이 50kg로 늘어났다. 서한의 내용을 보면 실제 커피가 당시 인편을 통해 조선으로 전달됐다. 신부가 요구한 커피의 분량이 혼자 마시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어서, 베르뇌 신부를 돕던 천주교 신자들이 나눠 마셨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커피를 마신 최초의 조선인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김대건 신부의 충남 당진 솔뫼생가.

그렇다면, 커피를 마신 최초의 조선인은 누구일까?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1821~1846)가 조선 땅은 아니지만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커피를 마신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1840년대로 철종보다 앞선 헌종 때이다.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 가운데 마카오 유학 중인 장면. 김 신부는 이곳에서 커피를 마신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던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조선의 신학생들이 커피와 빵 같은 서양음식을 먹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평화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성 김대건’에 묘사된다. 작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생가를 관리하고 있는 당진시청측이 커피를 마신 최초의 조선인으로서 그의 행적과 기록을 추적하고 있다.

17~18세기 예수회와 외방선교단은 세계 곳곳에서 커피를 선교에 적극 활용했다. 남미에서는 선교사들이 커피나무를 나눠주며 자립을 도왔다. 이 시기에 마카오에 파견된 선교사들에게 커피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조선 선교를 위한 본부는 중국의 북경에 설치됐다. 이에 따라 커피를 접한 최초의 조선인은 김대건 신부보다 50년 앞선 1780년대 정조 임금 당시 이승훈 선생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북경으로 건너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선생은 40여일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과 숙식을 하면서 교리를 배웠는데, 이 때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1785년 최초의 조선 교회를 세웠고 정약용 선생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런 인연 끝에 두 사람은 후에 처남 매부 사이가 됐는데, 당시 차를 좋아하던 다산 선생도 커피를 마셨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수원성을 축성하는 데에 사용된 거중기는 다산 선생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 원리를 응용해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양 학문이 다산에게 전해지는 자리에 커피가 놓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은 1876년 문호를 개방하면서 외국 선교사와 외교관들이 밀려들었다. 커피는 이들이 마시기 위해 유입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조선에 커피가 수입된 최초의 기록은 1988년 발간된 일본의 <외무성통상국편찬>에 들어 있다. 일본이 조선에 파견했던 영사들의 보고서를 묶은 ‘통상휘편’에 1883년 8월 조선국 인천항 수출입일람표의 수입외국산물품품목에 ‘커피’가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시점은 아관파천보다 13년을 앞선 것이다.

1883년은 인천항이 개항한 해로, 개항이 더 빨랐다면 커피에 관한 기록도 이보다 앞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종의 시대보다 앞서 커피를 국내에서 마신 정황이 기록으로 포착됐기 때문이다.

솔로몬왕은 시바 여왕의 미모와 현명함에 매료되어 파티 음식에 향신료를 넣도록 책략을 부린다.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이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인 메넬리크 1세다. 이탈리아 화가 지오바니 데민(1789~1859)이 그린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커피에서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예를 들어 기원전 10세기 솔로몬이 시바의 여왕이 풍긴 커피에 매료돼 침실로 갔으며,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국왕이 됐다는 이야기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주고 국기에 솔로몬을 상징하는 별을 수놓는 이유가 됐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는 트로이에서 살아 돌아온 헬레네를 축하하는 축제에 네펜테(nepenthe)가 제공된 장면을 오디세이아에서 묘사했는데, 이것이 커피였다고 이탈리아 언어학자인 피에트르 델라 발레가 1650년 펴낸 <아시아여행기>에 적었다. 이슬람권역에서 ‘카흐베’ 등으로 불리던 음료에 영어 명칭인 ‘커피’를 처음으로 부여한 영국 헨리 브런트경은 스파르타 전사들이 에너지를 높이기 위해 집단적으로 먹었던 블랙수프가 커피였다고 주장했다.

커피 기원설에 등장하는 목동 칼디와 염소. 유사랑 화백이 에스프레소 커피를 물감으로 사용해 그린 커피그림.

커피와 관련된 세계사 속의 민담과 같은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기원전 2, 3세기 에티오피아의 목동 칼디가 염소가 커피 열매를 따먹고 밤새 날뛰는 것을 보고 각성효과를 발견했으며, 기원후 7세기 동굴에서 고행을 하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된 마호메트가 커피를 마시고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커피에 관한 최초 기록은 기원후 900년쯤에야 지금의 이란 땅에서 나온다. 의사인 라제스가 처방전에 “커피는 뜨거우면서도 몸을 마르게 하지만 위장에 매우 유익하다”고 남겼다. 이때 커피는 번컴(Bunchum)이라 불렸다.

교황 클레멘스 8세가 1615년 이교도의 음료인 커피에 세례를 줌으로써 유럽의 그리스도 교인들도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됐다는 사연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필자가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교황청에 질의서를 보냈는데, “교황께서 커피에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나 물증은 없으니 풍문쯤으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역사적 사실인 양 회자되는 이런 류에 비해 김대건 신부와 이승훈, 다산 선생과 관련한 커피 이야기는 진위 가능성과 관련해 결을 달리한다.

만개한 커피나무

일본이 우리보다 커피의 뿌리가 깊다. 많게는 200년의 차이가 난다는 일각의 그릇된 주장도 바로잡아야 한다. 커피 재배가 아니라 커피 음료로서 아시아에 퍼진 경로는 19세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 또는 문호개방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1853년 개항한 일본에서는 35년 뒤인 1888년 ‘가히차칸’이라는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의 수교를 필두로 1883년 영국·독일과 차례로 수교하고, 14년이 흐른 1897년 상업적인 커피판매점이 등장했다. 앞서 1888년에는 인천항에서 문을 연 대불호텔이 커피를 제공했다.

일본은 1700년쯤 규슈의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섬에 네덜란드 상인을 거주시키면서 커피 문화를 만들어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증이 없이, 당시 통역관이나 상인들이 커피를 마셨을 수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커피에 관한 일본 최초의 기록은 나가사키에서 난을 연구하던 시즈키 다다오가 1782년에 쓴 <만국관규>인데, 음료가 아니라 식물로서 커피를 언급했을 뿐이다. 1867년이 되어도 일본의 지도층에게조차 커피는 낯선 존재였다.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이 파리만국박람회에 파견됐다가 커피를 처음 접하고 가슴이 상쾌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글로 남겼다.

신라 원성왕릉을 지키는 무인(武人) 조각상. 깊숙한 눈과 매부리코, 아랍식의 둥근 터번 등이 서역인의 풍모이다. 7~8세기 한반도는 커피 생산지 또는 교역지인 아라비아반도와 뱃길이 연결돼 커피가 전해졌을 수도 있다.

한국 커피의 뿌리는 아라비아의 대식국(大食國)과 벽란도를 통해 교역한 950년대 고려시대를 지나 7~8세기 신라까지 올라간다.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의 괘릉(掛陵)에 서 있는 무인 조각상 한쌍(높이 257cm)이 단서이다. 무인상들의 깊숙한 눈과 매부리코, 아랍식의 둥근 터번,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 등이 전체적으로 서역인 풍모다. 괘릉에서 포항쪽으로 50km 떨어진 흥덕왕(재위 826~836년) 능에도 서역인상 한쌍이 세워져 있다. 흥덕왕은 당시 당나라의 서주에서 활약하던 장보고를 귀국시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케 함으로써 해상실크로드를 연 인물이다. 청해진은 당나라를 거쳐 멀리 아라비아까지 뱃길이 연결됐다.

이 바닷길을 따라 커피가 일찍부터 한반도에 닿았을지 모른다. 신라의 경주가 서역땅인 이란(옛 페르시아)을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다는 사실도 여러 유물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옛 서사시 <쿠쉬나메>에는 신라로 망명한 왕자가 신라 공주와 혼인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신라시대까지 닿는 한국 커피의 역사를 사실로 입증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진위를 떠나 커피를 마실 때마다 기원을 떠올리며 한국사에 빠져드는 것은 커피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안데스산맥에 조성된 커피농장에서 잘 익은 커피열매를 선별해 수확하고 있는 필자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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