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국사①] 커피를 가장 먼저 마신 한국인은 누구일까?

인도 마이소르 지역의 커피 밭에서 함께 자라고 있는 녹색의 후추열매와 빨갛게 여문 커피체리를 감촉하고 있는 박영순 필자.  <사진=커피비평가협회(CCA) 제공>

[아시아엔=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 회장, <커피인문학> 저자, 전 세계일보 기자] 커피를 가장 먼저 마신 한국인은 누구일까? 한국의 커피 역사는 얼마나 깊을까? 고종 황제가 커피를 드신 최초의 조선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보다 12년 앞서 한양에는 커피가 식후 디저트로 제공됐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1821~1846)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서 커피를 제공받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는 1840년대 헌종 때 일이다.

17세기 예수회와 외방선교단은 커피를 선교에 적극 활용했다. 남미에서는 선교사들이 커피나무를 나눠주며 자립을 도왔다. 이 시기에 마카오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식생활에서 커피는 에너지를 주는 음료로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김대건 신부보다 50여년 앞선 1780년대 정조 시대에 이승훈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선생은 40여일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과 숙식을 하면서 교리를 배웠는데, 이 때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커피 전파시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은 묻혀 있던 진실을 발견하는 눈이 될 수도 있다. 커피한국사를 깊이 더듬어 갈수록 설렘은 커진다.

이승훈 선생은 1785년 최초의 조선 교회를 세우고 정약용 선생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두 사람은 후에 처남 매부 사이가 됐는데, 이때 커피도 전해져 정약용 선생을 각성시키는데 쓰였다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커피의 전파 가능성은 우선 서역과 한반도의 교역에서 찾아야 한다. 명나라(1368~1644)를 통해 실타래를 풀 희망이 보인다. 영락제는 원난성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정화를 환관으로 삼았다. 역사에 남은 최초의 대형선단을 일컫는 ‘정화함대’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 대원정은 인도와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커피의 고향인 아프리카까지 닿았다. 첫번째 원정규모만 따져보면 1492년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 보다 10배에 달한다. 정화는 당시 62척의 함선에 2만7000여명의 병사를 태웠는데, 오늘로 치면 1500톤 규모다. 산타마리아 호는 150톤 규모였다.

메카를 찾아간 정화함대가 그 유명한 모카항에 정박하면서, 당시 귀한 물건으로 대접받던 커피를 배에 싣지 않았을까? 당시 커피는 위장병 치료제나 이슬람교도들을 밤새워 기도하게 만드는 귀한 ‘신의 음료’였기 때문에 약재 품목에 적혀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이 발견됐다는 소리는 아직 중국에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멀리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에서 출발한 커피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예성강 하구에 있던 예성항에 점차 외국상인과 사신들이 몰리면서 ‘벽란도’라는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한 것이 950년대인 고려시대다. 벽란도가 송(宋)을 비롯해 요(遼), 금(金), 일본 등 주변국은 물론 아라비아의 대식국(大食國)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대상이 광범위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고려는 송에서 비단과 차, 약재, 책 등을 수입했는데, 약재 중에 커피가 있었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 중국에서 기록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에서 커피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2016년 12월 <중국커피의 역사>(A history of Chinese Coffee)라는 책을 영어판으로 냈다. 중국이 뒤지기 시작한 커피역사에서 송나라 때 아라비아반도에서 커피를 가져왔으며 그것이 고려의 벽란도 상인에게 약재로 전해졌다는 기록이 나오길 소망한다.

그럼 한반도에 커피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고려시대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통일신라와 당나라 때까지 닿는다. 신라 경주가 일본과 더불어 서역 땅인 이란(옛 페르시아)을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다는 사실은 여러 유물을 통해 입증됐다. 페르시아의 옛 서사시 <쿠쉬나메>에 신라에 망명한 왕자가 신라 공주와 혼인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1200~1300여년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 후반 고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약 200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영토를 지배했다. 삼국시대부터 페르시아와 교류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이 그 중 하나다. 봉분 앞에는 무인(武人) 조각상 한 쌍(높이 257cm)이 서있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풍모가 아니다.

깊숙한 눈과 매부리코, 아랍식의 둥근 터번, 헐렁한 상의에 치마같은 하의 등이 전체적으로 서역인(西域人) 풍모다. 괘릉에서 포항쪽으로 50km 떨어진 흥덕왕(재위 826~836년)의 능에도 서역인 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흥덕왕은 당시 당나라 서주에서 활약하던 장보고를 귀국시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케 함으로써 해상실크로드를 연 인물이다. 청해진은 당나라를 거쳐 멀리 아라비아까지 뱃길이 연결됐다. 이 바닷길을 따라 커피가 일찍부터 한반도에 닿았을 수 있다.

한반도의 커피 전파를 따라간 재미있는 상상은 신라시대까지 이어진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커피가 물보다 자주 마시는 음료가 됐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기원을 떠올리며 한국사에 빠져드는 것은 커피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행복이 아닐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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