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의 커피인문학-인도②] 힌두교 인도, 이슬람교와 만나며 커피 싹터
[아시아엔=박영순 커피테이스터, CIA 플레이버마스터, 서원대 외래교수] 흔히 커피가 차를 즐겨 마시던 인도 사람들의 입맛을 바꾸고 있다고 말하지만, 잘 따져보면 틀린 말이다. 인도 사람들이 짜이를 마시기 시작한 것보다 거의 200년 앞서 커피음용문화가 먼저 인도에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에서 커피의 음용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을 ‘커피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도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봐야 한다.
인도의 뿌리는 기원전 2500년경부터 거의 1000년간 번성했던 인더스문명(Indus Civilization)이다. 기원전 1500 무렵부터 중앙아시아에 살던 인도 게르만 어족계의 아리아인(Aryan)이 비옥한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하면서 인도에서 ‘베다(Vedas) 시대’를 연다. 아리아인들은 이 때 원주민들과 달리 자신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이 산스크리트어로 작성한 ‘베다’는 ‘지식’을 뜻하는 것으로, 훗날 브라만교의 성전을 지칭하는 용어로 활용된다. 인도의 역사는 베다의 출현과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에는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 BC 317~180)의 시조인 찬드라굽타(Chandragupta Maurya)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원정을 끝내고 철수한 틈을 타 군사를 일으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다. 그의 손자인 아소카(Asoka, ?~BC 232) 왕은 인도 남단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역을 통일하고 전성기를 열었다. 아소카왕이 불교에 귀하면서 당시 북인도의 지방종교에 머물던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는 계기를 연다.
마우리아제국이 기원전 2세기 멸망하면서 인도는 여러 나라로 다시 분열됐다. 이 때 그리스인들이 인도 서북부 지역을 침탈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된다. 이로 인해 불교 미술이 그리스·로마 계통의 미술과 혼합되면서 간다라(Gandhara) 미술이 탄생한다.
기원후 78년 쿠샨족 카니슈카(Kanishka) 왕이 그리스 세력을 몰아내고 서쪽으로는 이란, 동쪽으로는 중국의 한나라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쿠샨왕조(Kushan Dynasty)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쿠샨왕조는 226년 이란에서 생겨난 사산(Sasan)에 의해 이내 멸망하고, 인도는 다시 많은 소국으로 분열된 시기로 들어갔다.
이후 100년 가량이 흘러 찬드라굽타 1세(Chandragupta Ⅰ, 재위 AD 320~335)가 등장해 굽타왕조(Gupta Dynasty, 380~606)를 세운 뒤, 찬드라굽타 2세(재위 380~413)까지 전성기를 이룬다, 이 시기 인도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Jainism) 등이 융성하고 부흥해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한다. 하지만 찬드라굽타 2세때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훈족(Hun)의 침입이 시작됐고, 굽타왕조는 결국 606년 멸망했다. 인도는 이후 900여년 간 또 다시 여러 개의 소국으로 갈려진 분열의 시기를 거쳐야만 했다.
7세기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이슬람교가 창시된 이후, 인도는 운명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8세기 이슬람세력이 지중해와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해상무역에 나서면서 이미 바닷길을 누비던 인도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러다가 10세기에 들어서 이슬람세력이 인도에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에 투르크계의 가즈나 왕조(Ghaznavid dynasty, 962~1186)를 세웠다. 이에 따라 이슬람세력의 인도 침입이 잦아졌는데, 특히 마흐무드 왕(재위 998~1030) 때는 17차례 인도를 공격해 힌두교 신전을 파괴하고 재물을 빼앗아 갔다.
인도는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힌두왕국끼리 내분이 잦아 공동대응을 펼치지 못했다. 점차 북인도가 이슬람 세력에 넘어갔고, 불교 유적도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불교 세력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
13세기에 들어서 이슬람세력은 델리를 손에 넣으면서 인도를 북부에서부터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칸고원 이남의 남인도는 16세기 무굴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슬람에 저항하며 힌두교를 믿는 여러 왕조가 영토를 나누어 다스렸다. 그러나 힌두교 세력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스트제도의 신분차별에 신음하던 하층민들이 “알라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이슬람의 교리에 끌려 이슬람세력을 반긴 것도 인도의 운명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1526년, 몽골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북인도의 중심지인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하면서 이슬람왕조인 ‘무굴제국(Mughal Empire)’을 만들었다. 무굴제국은 이후 1857년 영국이 세포이(Sepoy)의 항쟁을 진압하고 인도를 식민지배하기 전까지 330여년간 유지됐다.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이 때 건국 지도자들의 견해 차이로 영토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독립하게 됐다.
▶ ‘짜이’보다 200년 먼저 인도에 도착한 커피.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등 종교적으로 유난히 굴곡이 심했던 인도의 역사에서, 커피는 17세기 이슬람왕조인 무굴제국 때 전파됐다. 반면 짜이는 이보다 200년 늦은 1857년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홍차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인도 내부에 퍼지게 됐다. 따라서 인도에서 짜이보다 커피 음용의 역사가 더 깊다.
짜이 문화는 북인도에서 융성했다. 영국은 중국에 의지하지 않고 차를 조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인도 동북부 아삼지방에 대규모 차 생산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영국은 차와 관련해 90%에 달했던 중국무역의존도를 인도를 강점한 뒤 10%까지 낮출 수 있었다.
인도에서 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저급한 찻잎이 많이 남아돌게 됐고, 이를 인도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우유와 향신료를 섞어 만든 것이 짜이다. 인도 사람들이 처음부터 영국인처럼 차 문화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지배층인 영국은 지속적인 차 생산을 위해 인도사람들에게 차 문화를 퍼트렸다. 공장과 광산 등 노동자들에게 티타임(Tea time)을 제공하고, 직장에서 하루에 서너 차례 이상 커피를 제공하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길거리에서도 짜이를 파는 ‘짜이왈라’가 등장했다. 짜이를 즐기는 문화가 인도에서는 깊게 뿌리내려 있지만, 따지고 보면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반면 인도에 커피가 도착한 시기는 이보다 2세기나 빠르고 사연도 드라마틱하다. 인도 사람들은 이슬람 신비주의자였던 바바 부단(Baba Budan)이 등장하는 ‘커피기원설’을 자랑한다. 바바 부단은 사우디아라미아의 메카로 순례를 다녀오던 길에 커피 씨앗 일곱 알을 몸 속에 숨겨 온다. 이 시기를 두고는 1600년경이라는 주장과 1695년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지만, 17세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메카와 예멘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은 큰 부를 안겨주는 커피 씨앗이 아라비아 권역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다. 커피 생두가 외부로 나가야 하는 경우에는 삶거나 볶는 방식으로 번식력을 없앴다. 이런 상황에서 바바 부단이 순례길에 예멘에 들려 산지에서 신선한 커피 생두를 몰래 인도로 가져간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우리에게 이 대목은 고려 말의 문신 문익점(1329~1400년)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한국의 커피애호가들에게 바바 부단은 ‘인도판 문익점 선생’으로 불린다. 바바 부단은 커피 씨앗을 카르나타카(Karnataka)의 마이소르(Mysore) 근처에 있는 찬드라기리 힐(Chandragiri Hill)에 심어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해발고도가 1800여m에 달하는 고지대로서, 지금은 ‘바바 부단 기리(Baba Budan Giri)’라고 불리는 곳이다. ‘기리(Giri)’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바바 부단에 의해 아랍의 커피 독점은 막을 내리고, 커피는 더 넓은 지역에서 경작되기 시작했다. 인도를 식민지배하던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커피를 대량 본국으로 보내면서 인도는 거대한 커피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이 즈음 인도의 남동쪽에 있는 ‘실론섬(스리랑카)’은 네덜란드의 식민통치(1658~1796년)를 받고 있었는데, 바바 부단과는 다른 경로로 커피나무가 유입돼 재배됐다. 네덜란드는 1616년 직물상인 피테르 반 데르 부뢰크(Pieter van der Broeck)가 예멘에서 묘목을 몰래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가 키웠는데, 여기서 키운 커피를 실론에 심었던 것이다. 1796년 영국이 실론섬을 차지한 뒤 커피를 대량 재배하면서, 실론은 1860년대에는 세계 커피생산량의 50%를 차지하는 생산지로 부상했다. 하지만 1869년 실론에서 커피 녹병(Leaf Rust)이 창궐하면서 커피나무가 전멸했다. 그 후로 실론은 차나무를 재배해 차의 왕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