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맛 감상법···”맛은 ‘생각의 도구’이다”
[아시아엔=박영순 <아시아엔> 편집위원, <커피인문학> 저자, 커피비평가협회장]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식음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뇌가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커피를 마시고 행복해하는 것은, 커피의 향미가 뇌로 하여금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생각을 이끌어 준 덕분이다. 맛을 보고 먹어도 되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보다 좋은 맛을 추구하고, 더욱이 그 과정을 통해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인류는 언제부터 맛을 추구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일까? 유력한 시기 중 하나가 1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즈음이다. 식재료를 불로 가공할 때 갈변반응, 캐러멜반응 등을 통해 다양한 맛이 생겨난다. 하지만 가열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상태에서도 매력적인 맛을 내는 먹을거리는 수두룩하다. 따라서 불이 인류에게 맛을 깨우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불 사용이 인간의 뇌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림으로써 생각하는 능력을 높여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능이 높아진 인류는 생존을 위해 먹는 행동을 스스로 개선해 나아갔을 것이다. 가열한 음식이 보다 소화가 잘 된 덕분에 같은 양을 섭취하더라도 더 많은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체득했고, 이런 경험 속에서 인류는 불의 맛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진화했다. 마침내 인류의 DNA에는 몸과 정신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는 식음료를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지도록 하는 장치가 새겨졌다. 그렇다고 식음료에 대한 신체의 이화학적 반응이 맛이 하는 역할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불을 이용할 정도로 두뇌가 발달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단기간에 멸종된 이유를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언어를 주고받으며 신속하게 단체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이 서식지와 먹을거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호모 에렉투스를 멸종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만들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언어를 구성원들의 행동을 일시에 맞추도록 하는 소리 신호쯤으로 봐선 안 된다. 언어의 진정한 가치는 인류를 사유로 이끌었다는 점에 있다. 언어는 곧 ‘생각의 도구’인 것이다.
생각을 말로 표현해내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특징이다.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인류는 6만~7만년 전 돌연변이로 인해 두뇌회로에 변화가 생기면서 언어능력을 갖게 됐다. 이것은 인류에게 축복이었다. 언어는 단지 소통의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소통을 위해서라면 수화(sign language)만으로도 가능하다.
언어가 인류를 사유하는 존재로 이끌어 주었다는 점을 다윈은 간파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언어능력을 생물학적으로 규명하는 생물언어학(biolinguistics)이 촘스키에 의해 정립됐는데, 요지 중 하나가 “인간의 정신(mind)과 물질(body)이 이질적이라는 데카르트의 물심이원론은 틀렸다”는 주장이다. 언어능력을 모호하게 정신영역으로 볼 게 아니라 위, 심장, 간 등 여러 장기처럼 뇌의 특정 부위가 역할을 해서 만들어내는 생물학적 기능으로 설명하자는 관점이다.
언어능력이란 위가 음식을 소화해 영양분으로 만들 듯, 뇌가 특정 자극에 대해 반응하도록 작동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인간이 말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뇌라는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견해는 우리를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커피 한 잔은 그 분량만큼 배불러지는 것보다 향기와 맛으로 뇌의 일정 부분을 작동케 함으로써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데 의미가 있다. 이 현상은 에너지로 쓰이는 당분을 만났을 때 이를 되도록 많이 섭취하기 위해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진화했다는 가설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구석이 많다. 향미 좋은 커피를 마시면, 때론 지그시 눈이 감기면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단지 커피를 더 많이 마시기 위해 몸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먹은 순간 과거의 한 순간으로 이동한 것처럼 생생한 경험을 하는 대목은 맛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혀와 코에 무엇인가 닿은 듯한 느낌을 감지하는 것은 감각(sensation)이고, 그것이 커피임을 알아채는 것은 지각(perception)이다. 지각은 곧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맛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 지각이 반복되면서 인간 고유의 정신활동 덕분에 새로운 정보가 만들어진다.
커피를 반복해 마시면 향미만으로 커피나무가 자란 땅과 기후를 가늠할 수 있고, 재배와 가공에 쏟은 농부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다. 목을 타고 내려오는 커피 한 모금이 환희에 차게 하고 때론 눈물짓게 만들기도 한다. 그 한 모금이 우리의 관능을 매만지면서 곧 우리의 일부가 된다.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된 인류가 맛을 통해 보다 깊은 사유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인공지능시대에 새롭게 가치를 조명 받고 있는 미학(aesthetics)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이성보다는 감각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접근법이 아닌가. 커피의 향미를 음미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사유하는 길이 열리고 있다. 이를 통해 인류가 잠재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지 모른다. 그 시작점은 한 잔의 커피라고 할지라도 미식(美食)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데 있다.
맛을 구별하는 능력은 이미 우리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다. 먼 옛날 한반도를 밟은 호모 사피엔스 중 타는 냄새를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DNA를 지닌 부족은 진화 과정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을린 냄새를 잘 구분하는 부족은 산불이 발생했을 때 코로 징조를 감지하고 재빨리 대피함으로써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쓴맛을 구별하는 능력도 자연에서는 종의 생존을 좌우한다. 치명적인 독소들은 거의 대부분 쓴맛이 강하다. 이런 성분이 입에 들어왔을 때 위험으로 판단하고 뱉은 부족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인류는 오랜 세월 진화를 통해 쓴맛을 빨리 감지하는 본능을 계속 강화해왔다. 여기에 음식이 부패했다는 신호로 작용하는 자극적인 신맛도 쓴맛과 같은 방식으로 종을 걸러내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단맛의 역할은 조금 달랐다. 에너지원인 포도당은 자연에서 단맛을 내는 음식물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들어있다. 따라서 같은 양의 음식을 먹더라도 단맛이 많은 것을 골라 섭취한 부족은 더욱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짠맛은 똑같은 음식이 주어졌을 때 한자리에서 많은 양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관능적 요소다. 소금 없이 설렁탕을 먹을 때 생각만큼 먹지 못하고 질려 하게 되는 경험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커피 맛을 모른다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미식은 ‘내 안에 든 맛에 대한 본능을 발견하는 자아 개발의 과정’이다. 와인과 위스키, 사케, 차, 맥주, 커피의 향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맛을 구별하는 능력이 이미 내 안에 들어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특정한 맛이 불러일으키는 본능적 쾌감은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스위치를 켜는 신호가 아닌가 싶다. 같은 새우젓호박찌개라도 어머니가 끓여준 게 더 사무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새우젓호박찌개를 맛보는 순간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수많은 영상이 그리움이라는 감성을 건드리면서 눈물짓게 한다. 눈물짓게 만드는 맛보다 더 훌륭한 맛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미식은 인류의 감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듦으로써 진화의 동력으로도 작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잊고 지내던 사람을 생각나게 하고, 그와 함께한 시간과 공간을 영상으로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향미를 추구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