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로 철학하다···”나를 생각으로 이끈 바로 그것”

커피 씨앗에서 잠들어 있던 생명이 움터 나오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커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선 탄생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 <출처 커피비평가협회(CCA)>

[아시아엔=박영순 <아시아엔> 편집위원, 커피비평가협회 회장, <커피인문학> 저자] 커피에 철학을 입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언어적 유희에 그쳐선 안 된다. 진중하게 커피의 본성을 헤아려야 한다. 이런 다짐을 되풀이하면서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는 나그네처럼 설레기도 하지만, 과연 그 길이 있기나 한 것인지 걱정도 된다. 용기를 내 펜을 든 것은, 수많은 지식들이 말하는 ‘철학의 정의’ 덕분이다. 철학은 개별적 진리를 포괄해 담아내는 학문이다. 여기에 커피가 빠진다면 허망하다. 커피의 본질을 풀어내는 이른바 ‘커피철학’의 이야기는 철학이 탄생한 기원전 7세기 밀레토스의 탈레스에서 시작된다.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고지대에서 커피 체리를 수확하고 있는 필자.

본질을 파헤치는 첫 삽은 마땅히 ‘탄생의 비밀’을 향한다. 커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후 9세기 이슬람인 압바스 왕조에서 나오지만, 구전은 신화의 시대까지 한 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000년 쐐기문자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늙은이가 젊은이가 되다’라는 긴 이름을 가진 나무가 등장한다. 불멸의 삶을 보장해준다는 이 나무에는 가시가 있다. 영생을 얻으려던 길가메시는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가시는 진실을 만나기 위해 인간이 넘어서야 할 관문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가시는 나무에게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다. 가시가 없는 나무들은 동물에게 쉽게 먹힐 수 있기 때문에 꽃가루를 통해 일시에 엄청난 양이 씨앗을 퍼트리는 전략으로 소멸의 위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길가메시 시대에 커피나무는 지금의 카메룬 지역에서 치자나무의 형태를 하고 자라고 있었다. 동아프리카 지질활동으로 거대한 평지가 생기자 치자나무는 고향을 떠나 에티오피아로 머나먼 여정을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 동물과 곤충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단으로 카페인을 저장할 수 있게 된 나무들이 커피로 진화했을 것이다. 어머니쪽은 유게니오이데스(Eugenioides)에서, 아버지 쪽은 로부스타(Robusta)에게서 형질을 받아 지금의 아라비카(Arabica) 종으로 모습을 갖추고 에티오피아 카파에서 군락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커피가 수천km의 험한 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나무로서는 드물게도 뿌리에서부터 줄기, 잎, 심지어 꽃술에까지 카페인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덕분이다. 환경적인 위험이 카페인을 만들어 냈고, 끝내 치자나무를 커피나무로 변모시킨 과정은 본성에 관한 깊은 사유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미켈란젤로가 1509년 그린 ‘타락과 낙원에서의 추방’(The fall and expulsion from paradise)을 보면 선악과가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 존 밀턴이 17세기 <실락원>을 쓴 뒤에야 선악과는 사과로 묘사됐다.

구약의 시대에 커피는 모세 5경(Five books of Moses) 중 1경인 창세기에서 모습이 스친다. 기원전 1440년경 모세는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를 묘사한다. 뱀의 유혹에 빠져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이 나무의 열매는 사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존 밀턴의 실수였다. 모세는 선악과라고 했을 뿐인데, 창세기가 쓰인 지 3000년이 지난 1667년 밀턴이 대서사시 <실낙원>을 펴내면서 슬쩍 사과로 바꿨다.

이런 사연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손꼽히는 바티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에서 드러난다. 1510년 이 그림을 완성한 미켈란젤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그릴 수 없었다. 그는 선악과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튜어트 리 앨런은 1999년 펴낸 <악마의 잔>(The Devil’s Cup)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사과가 아니라 커피 열매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보인 반응이 카페인의 각성효과였다는 주장이다.

고대 그리스 영웅들의 서사시에서 기원전 12세기경에 벌어진 것으로 묘사되는 트로이 전쟁에서도 커피로 추정되는 네펜테(Nepente)가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언어학자 피에트르 델라 발레는 1650년 출간한 <중동여행기>에서 “트로이에서 살아 돌아온 왕비 헬레나를 축하하기 위해 스파르타인들이 벌인 잔치에서 포도주와 함께 제공된 네펜테는 커피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펜테가 근심과 두려움을 잊게 했으며, 일정 시간 지나면 약기운이 떨어졌다”고 묘사된 부분은 카페인의 반감기와 일치한다고 했다.

커피라는 용어를 만든 영국의 헨리 블런트 경은 1650년께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먹은 블랙수프가 커피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신화의 시대에서 몇몇 커피의 흔적과 목격담이 발견된다.

바야흐로, 기원전 6세기. 탈레스의 등장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인간의 태도에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말하자, 그리스 철학이 태동했다. 장차 학문의 도태가 될 ‘인간의 사유’가 시작된 것이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본질을 맹목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생각하는 힘으로 찾아야 한다는 신념이 싹튼 순간이다. 현대과학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탈레스의 견해는 틀렸다. 하지만 그는 인류를 신화에서 탈출케 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커피의 본질은 향미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플라톤은 감각은 본질에 다가가는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커피의 품질을 평가하기 위해 세팅된 커핑(cupping) 테이블. <출처 커피비평가협회(CCA)>

여기 한 잔의 커피가 있다. 신화에서 벗어나 커피를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일까?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고요해 보이는 한 잔의 커피 속에는 수많은 물질들이 생성하고 소멸되며, 대립하고 투쟁하고 있다. 물질들 간에 고도의 긴장감이 없다면 형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커피 속에는 1000여종의 화학물질이 들어 있는데, 한 잔의 제한된 공간을 어떤 성분들이 얼마만큼 차지하느냐에 따라 맛의 성격이 달라진다. 만물의 근원을 불로 본 헤라클레이토스의 견해에 따르면, 불로 로스팅해야만 본성이 발휘되는 커피는 공기, 바람, 물, 흙, 영혼으로 변화하는 불의 한 지점일 뿐이다. 여기서 불은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봐도 좋겠다. 커피를 마시면 에너지가 솟구치는 현상은 카페인의 각성효과 뿐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불로도 수사할 수 있다.

이로부터 100년쯤 지난 기원전 5세기. 파르메니데스는 “감각되는 것에 속지 마라”고 일갈했다. 커피 속에서 수많은 물질이 생성하고 소멸하며 대립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감각은 모든 오류의 근원일 뿐이라며 헤라클레이토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면서 불생불멸하는 사물의 본질은 이성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이성만이 진리라고 했다. 향후 2500여년 서양 철학을 지배할 존재론과 관념론의 토대가 구축된 순간이다. “존재하는 것은 사유할 수 있고, 사유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로 연결된다.

하와이 코나의 그린웰농장에서 자라고 있는 100여년 수령의 커피나무.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커피의 본질은 100년을 자라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무엇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커피철학에서 이 대목은 득실이 있지만 손익계산을 하면 남는 게 있는 쪽이다. 진리를 발견하는데 인간의 감관(sense)은 방해가 될 뿐이라는 플라톤 사상은 커피를 맛보고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하급감각으로 취급 받은 후각, 미각, 촉각에서 출발하는 아름다움은 감각되지 않고 오직 사유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이데아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다는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오래 전 이런 관점이 되레 커피를 문화적으로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고 있다. “한 잔의 커피로 영혼을 달랜다”는 표현은 다분히 플라톤적이다. 향과 맛을 넘어 오감으로 감각되지 않는 ‘사유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을 은유한다.

시간이 2200여년을 흘러 임마누엘 칸트에 와서 오감은 사유를 만나 감성으로 승화한다. 그는 저서 <인간학>에서 인간의 신체가 물체적인 것에 의해 촉발되는 ‘외감’ 뿐 아니라 마음에 의해 촉발되는 ‘내감’을 발견했다. 이것은 곧 상상력이며 사유이다. 감각이 사유를 만나 감성으로 승화한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 감각되어지는 것과 생각되어지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는 관점은 17세기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도 목격된다. 인간이 각각 독립적인 정신과 물질(신체)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인데, 플라톤의 이원론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진리처럼 보이던 심신이원론도 한 세대 뒤쯤 나타난 스피노자의 도전을 받았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사유(정신)의 측면과 연장(신체)의 측면을 모두 가진 존재이고, 심신은 서로 동등하면서도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 같은 세기적인 철학자들의 거대한 담론이, 그에 비해 사소해 보이는 커피로 풀이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철학은 개별적 진리를 포괄해야 하는 학문적 의무를 지녔기 때문이다.

커피철학의 시대에 커피 음용법은 바뀌어야 한다. 맛뿐 아니라 사유를 추구하면서 커피의 본질에 다가가자는 것이다. 커피를 마실 때 달다, 쓰다, 시다는 등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바에 멈추지 말자. 커피 향미가 어떤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지를 인내심을 갖고 그 뿌리를 더듬어가야 한다. 한 잔에 담긴 커피는 내 몸으로 들어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나의 관능이 되고 나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커피의 가치는 ‘나를 생각으로 이끈 것(To make me think)’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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