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커피···군인에게 최상의 커피를 제공해야 하는 이유

커피 열매는 과육이 부족해 과일로서는 사람들의 손을 별로 타지 않았다. 그러나 염소와 낙타가 먹고 활력을 얻는 것을 보고 소위 ‘보양식’으로서 커피를 찾게 됐다는 견해가 있다. 커피열매와 씨앗. 유사랑 화백이 에스프레소로 그렸다. 

[아시아엔=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 <커피인문학> 저자, <아시아엔> 편집위원] 커피 역사에서 가장 간절하게 쓰인 곳은 전쟁터다. 에너지를 솟구치게 하고 정신을 또렷하게 만드는 카페인의 속성은 목숨이 걸린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에서 빛났다.

나폴레옹이 군보급품으로 커피를 병사들에게 나눠준 최초의 인물로 묘사되지만, 유럽만 따질 때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실제 그렇게 했는지를 입증할 물증은 없다. 나폴레옹이 소문난 커피마니아인데다 대륙봉쇄령을 통해 커피 공급을 제한하는 전략을 펼쳤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커피 열매는 과육이 부족해 과일로서는 사람들의 손을 별로 타지 않았다. 그러나 염소와 낙타가 먹고 활력을 얻는 것을 보고 소위 ‘보양식’으로서 커피를 찾게 됐다는 견해가 있다. 유사랑 화백이 에스프레소 커피를 사용해 그린 ‘목동 칼디와 염소’

커피는 탄생 시절부터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아주 먼 옛날 아라비카 커피가 탄생한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는 음식이자 약이었다. 커피는 특히 부족 전체의 생명이 걸린 크고 작은 전투에서는 필수품이었다. 주거지를 두고 싸움이 벌어질 때 각 부족은 전사들의 힘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는데 골몰했다.

커피 열매는 겉보기에는 체리처럼 맛있어 보이지만, 과육이 거의 없어 사람들의 손을 잘 타지 않았다. 그러다 낙타와 염소가 먹고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목격하고 열매나 잎을 씹으며 그 효과를 경험하게 됐다. 각성효과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부족의 사활이 걸린 전투를 앞두고 성스러운 커피 의식이 생겨났다.

그들은 정신을 또렷하게 하고 힘을 솟구치게 만드는 효과가 커피의 씨앗에 농축되어 있음을 깨닫고 씨만 골라내 볶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기분 좋은 향기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주었고, 톡톡 터지는 팝핑(Popping) 소리는 마치 승리를 약속하는 ‘신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이슬람교가 창시된 이후 무슬림 사이에 커피 소비가 급증하면서 예멘은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예멘 고산지대 작은 커피 농장에서 재배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기원전 10세기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시바’라고 하는 왕국에 속했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초부터 예멘 땅에는 힘야르 왕국이 출현하면서 기원후 6세기경에는 전쟁으로 인해 두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전쟁 중 에티오피아 전사들이 애용한 커피의 효능이 포로들을 통해 예멘측으로 전해져 마침내 자연 채집되던 커피가 농장재배 시대를 맞게 됐다.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610년)한 후 631년 예멘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무슬림 사이에는 동굴수행을 하다 죽을 처지에 있던 무함마드가 천사를 통해 커피를 마시고 살게 됐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메카에서는 “커피를 몸에 담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까지 생겨나 커피는 ‘신의 음료’로 대접받게 됐다.

이슬람은 성직자가 없다. 누구나 중재자 없이 신을 만나기를 소망하는데, 특히 수피교 신비주의자들은 커피를 신을 만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이런 드라마틱한 사연을 통해 아랍 전역으로 퍼져 일상이 된 커피가 구전이 아니라 문헌을 통해 목격되는 것은 10세기경 압바스왕국 시대의 페르시아다. 연금술사이자 의사였던 라제스가 위장병 치료에 커피를 처방했는데, 이 기록이 커피에 관한 인류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500여년간 커피에 관한 기록이나 전언이 없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200년에 걸쳐 이어진 십자군전쟁에서도 커피에 관한 언급조차 없어 라제스의 처방을 커피가 아닌 다른 식물로 보는 주장도 있다.

16세기에 들어서 오스만튀르크가 이집트와 예멘을 공격할 때 커피가 다시 기록에 나타났다. 이슬람 내부에서 커피를 마시는 수피를 탄압한 이른바 ‘커피 박해’(Coffee Persecution)가 1511년 메카와 1524년 카이로에서 각각 한 차례씩 두번 발생했다.

커피를 마시는 자리를 통해 지도층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저항의식을 키워가던 일각의 세력을 탄압한 것이다.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하는 자리와 달리 커피가 있는 곳에서는 정보가 교류되면서 개인적 각성이 이루어졌으며, 시대적 혁명의 기운으로 타올랐다.

커피 마신 사람을 가죽포대에 담아 강물에 빠뜨린 기록도 나온다. 정적 제거에 커피음용이 구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커피가 전쟁터뿐 아니라 정치세력간 알력과 심리전에도 은밀하게 활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커피가 전쟁을 치르는데 필수품이 됐다는 사실은 1683년 비엔나전투에서 드러났다. 오스만튀르크 30만 대군이 합스부르크의 수도를 포위했다가 그리스도교 연합군이 가세하자 퇴각한 사건 때문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철수를 했는지 병사들에게 보급하는 커피 생두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채 사라졌다.

유럽연합군은 처음에는 튀르크군이 끌고 온 코끼리의 먹이인 줄 알았는데, 곧 커피의 각성효과가 병사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밤잠을 쫓아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전쟁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에 ‘블루보틀’이라는 카페가 문을 열게 되고, 베니스 상인을 통한 이탈리아 루트와 함께 유럽에 커피를 전하게 됐다.

유럽 각국은 커피가 한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아예 식민지에 커피나무를 심었다. 네덜란드가 1658년 실론에 커피나무를 옮겨 심은 것을 신호로 유럽 강국들은 경쟁적으로 커피를 재배했다. 1680년부터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커피를 재배한 네덜란드는 1712년 처음으로 커피 400kg 가량을 자국으로 들여왔다. 아라비아 상인을 통하지 않고 자급자족한 이른바 ‘식민지 커피’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에서 커피 묘목을 받아 1723년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섬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여기서 자란 나무가 브라질로 옮겨지고 연이어 퍼져 나가면서 사실상 아메리카 대륙에 퍼지는 커피의 원조가 된다.

유럽이 커피를 재배하는 과정은 전쟁보다 잔인했다. 식민지에서 커피농사를 짓기 위한 인력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했다. 16~19세기 노예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대륙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은 4000만명에 달했다.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에서 북군이 승리한 요인의 하나로 ‘커피’가 꼽힌다. 링컨이 이끈 북군은 커피를 충분히 보급받았지만 남군은 미시시피강 봉쇄로 인해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전투가 잠시 멈출 땐 남군이 담배를 가져가 커피와 바꾸자고 했으며 종종 전쟁 중 물물교환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위키피디아

커피의 위대한 힘은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에서 링컨이 이끈 북군이 전쟁에 승리한 요인으로 지목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링컨은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를 봉쇄해 커피가 남군에 공급하는 것을 막는 한편 북군에게는 하루에 1.8ℓ의 커피를 충분히 공급했다. 미국 공식문서에 커피공급이 북군 승리 요인의 하나로 적시됐다.

21세기에서도 커피의 위력은 달라질 리 없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최상의 커피는 마땅히 군인에게 제공돼야 한다는 신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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