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의 포토보이스 16] ‘안경언니’ 김은정의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아시아엔=김희봉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현대자동차인재개발원, 교육공학박사] 답답함이 사라지고 시야가 확 트였다. 글자와 사물이 선명하게 보인다. 거울로 보니 왠지 분위기도 달라진 것 같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안경을 쓴 후 체감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안경은 의학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패션에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경을 착용한 사람들도 많다. 조금 더 살펴보면 같은 디자인의 안경은 찾아보기 힘들기도 하다. 아마 사람마다 시력도 다르니 자신에게 맞는 안경이 다른 사람에게도 맞지 않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물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이는 안경을 물적으로 접근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물적인 안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심적인 안경도 있다. 심적인 안경은 종종 선입견이나 편견 등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보이는 것을 보기보다는 보고 싶은 걸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안경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도 자신이 이런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심적인 안경을 잘못 쓰게 되면 오히려 쓰지 않음만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심적인 안경이 물적인 안경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안경이라는 것이다. 이는 얼마든지 선입견과 편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심적인 안경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즉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안경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숲속에서 새를 볼 때 시인의 안경을 쓰고 볼 수도 있고 다윈의 안경을 쓰고 볼 수도 있다. 쟁반 위에 놓인 사과를 화가의 안경으로 볼 수도 있고 뉴턴의 안경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에디슨의 안경을 쓰고 축음기를 보는 것과 음악가의 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분명 다르게 보인다.
사물뿐만이 아니다. 맹자(孟子)의 안경을 쓰고 사람을 보는 것과 순자(苟子)의 안경을 쓰고 사람을 보는 것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같은 사람이고 같은 말과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는가에 따라 달리 보이고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같은 것이라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일수사견(一水四見)도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심적인 안경은 얼마든지 많이 보유할 수 있다.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고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의지와 실행력만 있으면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라도 가능하다.
보유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독서다. 독서를 하면 수많은 심적인 안경을 보유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마다 언제든지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 없었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도 볼 수 있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할 수 있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한다. 새로운 관점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새로운 안경을 써야 비로소 볼 수 있다. 매번 같은 안경만 쓰고 있었다면 이참에 안경의 종류를 다양하게 구비해보자. 그리고 그동안 써왔던 안경을 벗고 새로운 안경으로 다시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