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의 추억’···승진 번복의 뼈져린 아픔 뒤로 한 채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스님에게 구육狗肉 탐식 들통 난 후 몇 년 흘렀다. 내가 근무하는 곳 중에서도 외진 면사무소 소재지에 유명한 보신탕집 있었다.
국장께서 “오늘 거기 가려고 하는데, 별 일 없으신가?” 이렇게 물으시는데 있다고 하겠는가. 있는 약속도 취소하고 모신다.
즐기셨다. 자주 오셨다. 오실 때마다 관할구역 경계까지 나가 영접, 동석했다. 내 식단만은 백숙. 게다가 또 한 분, 전직 대학장에 현재 다른 관청 위원인 선배는 민물매운탕 애식가였다.
주말이면 고향 가는 길목의 내 사무실 찾으셨다. “지역 기관장이 같이 가야 대우도 받는 거여. 그 저수지 탕 잘하는 집 가세. 자네는 백반 먹고.”
살던 곳으로 보냈다
촌 노인어른들께서 저수지의 잉어, 붕어, 자라 잡아들고 찾아오신다. “시골 오셔서 고생하시는데 줄 게 이거 밖에 없구먼” 하신다.
정중히 받는다. 차비 드린다. 때로는 차로 댁까지 모시게 한다. 이게 소문 나 저수지에서 잡아오시는 분 늘었다.
직원 중에 임신한 부인 있는가 물어 본다. 잉어는 그 집으로 보낸다.
대부분은 어르신들이 보지 않을 꼭두새벽 인적 드문 때 잡혀온 그 저수지에 가서 방생한다. 당연히 마나님이 감독관으로 동행!
쪼르르···. 냅다 물속으로, 그야말로 물결 가르며 헤엄쳐간다. 뒤 돌아보지 않는다. 사람도 잡혀 있다가 풀려나가면 저럴까.
개고기와 민물고기 탕 봉사를 ‘모시기는 즐겁게!’를 모토로 서비스했다. 찾아주시는 건 믿고 사랑한다는 증표 아니겠는가!
배우는 게 많았다. 그 두 분은 솔직하고 정 많았다. 존경했다. 경험담이 인생교과서이기도 했다.
순항이 녀석이 봉직하는 대학교 교수님들과 낚시하러 온 날 에스코트 하여 기분 나게 했다.
방생하는 곳에서 내 친구와 내 친구 학자들이 잡아서 탕 먹게 하는 즐거움 줬다. 복 받을 나다.
보신탕과 승진
1년 후 2과장 때 국장이 사시사철 보신탕 즐겼다. 국장 모셔야 하는 서무과장 1과장, 속 타들어갔다.
승진 앞둔 불교신도 1과장, 매일 살생한 걸 대면했다. ‘이러니 이거 어디 승진하겠냐’ 한탄이다.
나보고 “좀 대신 수행해달라” 부탁했다. “어이구, 무슨 말씀이세요” 버텼다.
1과장 정식 발표 하루 전 오후에 나온 승진 내정자 명단에는 이름 버젓이 들어 있었다. 축하객 발길 이어졌다. 축전과 축하난 답지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온 공식명단에 1과장 이름 빠졌다. 하루 밤새 우여곡절 있었던 거다.
다른 사람이 승진했다. 개고기 탓이라 통탄했지만 때는 늦고 말았다. 그 길로 말도 없이 조퇴. 이튿날 출근하지 않았다.
성북구 동소문동의 집까지 매일 찾아갔다. 나오시라고 설득했다. 내년에는 꼭 될 겁니다. 그런다고 마음 동하겠는가. 한 일주일 지나서야 나왔다.
다음해 기약하지 못하는 게 승진이다. 다행하게도 그 보장불가保障不可의 승진을 했다.
십수 년 흘렀다. 충남에서 근무할 때다. 그 옛 1과장에게서 전화 왔다.
“사망판정 받았어. 마지막으로 대전의 한방 암치료 받고 싶네. 주선 좀 부탁한다”고 했다.
키 컸다. 체격도 우람했다. 강건했었다. 그런데 암에 걸렸다. 그때 그 승진번복의 모멸감 잊지 못하고 살았단다. 대전 왔다 간 후 이내 타계他界.
나도 죽는다는 사실 모른 채
가을 색 깊어간다. 전전긍긍하던 견공들 이제 좀 안심하려나. 그런데 시절이 하 수상하다. 인스턴트 보신탕에 뷔페까지 등장,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참에 논산 충순군에게 맡긴 진돗개 흰순이나 보러가야겠다. 공주 인철군에게 맡긴 풍산개 풍돌이도 만나 봐야겠다. 다들 어찌 지내나.
수덕사 법장스님께서 몸소 데려왔다. 키워보시라며 맡기신 견공들이다. 무슨 뜻이었을까.
내 곁의 존재들 그대로 있어 주질 않는다. 변한다. 떠나간다. 그러다가 나도 간다, 빈손으로. 열반하신 법장스님의 무언지도無言指導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