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10월 19일 발생 71주년···”역사왜곡에 두번 죽는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빨갱이’ 어원이 친일잔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1930년대부터 체제를 위협하는 공산당을 일본인은 赤(아카)라고 불렀다. 일본이 급히 항복한 것은 원자폭탄만이 아니라 일본사회에 미만한 좌익의 위험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육사 11기생 한분은 1950년대 북한에서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전향하여 중앙정보부에 촉탁으로 있으면서 이정식을 비롯하여 해방 전후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김남식이 이상하다는 문제제기에 “걔는 아카야”라는 한마디로 규정해버렸다.
미국에서는 공산당을 일반적으로 reds라고 불렀다. 이를 그린 영화 가 나왔을 정도다.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자본주의의 본산 미국에서도 1930년대 공산당이 번성했던 시대가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이때를 그린 것이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이래 서구 좌경 지식인이 소련을 동경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미국과 영국의 상당수 지성인들이 정부 내에도 들어가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루즈벨트 정부가 소련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도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영제국을 경영했던 처칠 수상은 막 세계제국으로 떠오른 루즈벨트 대통령에 이점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1950년 2월 매카시 상원의원이 소련 간첩이 정부에 진을 치고 원자탄 등 최고급 정보를 소련에 제공했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러한 첨단기술 절취에 힘입어 1949년 9월 소련은 미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르게 원자폭탄을 갖게 된다. 미국의 원자탄 독점이 깨어지자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트루만 대통령이 즉각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대한민국으로서는 천행이었다.
우리 국민에 공산주의자의 실체를 똑똑히 알려준 것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이었다. 몸서리쳐지는 캄보디아의 killing field가 이때 이미 저질러졌다. 공산당의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된 국민들은 일제의 ‘아카’를 떠올려 이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하게 된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숨어있던 좌익이 시작한 반란이지만,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역에 숨어있던 좌익이 가담하여 확대되었다.
여순사건으로 군내의 빨갱이가 발각돼 숙군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1949년 5월 군내에 숨어 있던 좌익 강태무·표무원이 위험을 느껴 각각 대대를 이끌고 월북했다. 이 상태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면 국군은 싸우기도 전에 붕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