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내강형’ 정치인보다 ‘표리부동’ 김 대리가 훨 좋다

표리부동한 건 다 나쁘다구요? 천만예요!

[아시아엔=석혜탁 <아시아엔> 기획위원]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 표현 뒤에는 흔히 부정적인 술어가 동원되곤 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배워왔다. 이유도 모른 채 ‘표리부동은 부정적 표현’이라고 학습했다. 사자성어를 암기 시험을 통해 기계적으로 공부하는 우리의 교육과정에서 이 부정적 의미 연상은 꽤나 오래가게 된다.

실제 용법도 그렇다. 포털 뉴스검색에 표리부동을 입력해보면, 보통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의도로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첨예한 갈등 상황이 반복되는 정치 관련 기사에서 이 사자성어를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사의 맥락을 보면 이렇다. 협치와 대탕평을 중시한다면서 불균형하고 문제적인 인사를 거듭하는 여당을 몰아붙이는 야당의 공격에서 ‘표리부동’이 나온다. 반대로 국정 발목잡기식 비판을 쏟아내면서 겉으로는 민의를 앞세우는 야당을 쏘아붙이는 여당의 공격에서도 ‘표리부동’이 나온다. 여야의 입장에 대한 필자의 판단은 여기서 굳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다만 ‘표리부동’이 여야 막론하고 상대를 힐난하는 모욕적 언사이자 공격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실제 그 쓰임이 어떻든 간에 표리부동의 한자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딱히 나쁠 것도 없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겉(表)과 속(裏)이 같지 않은(不同) 게 뭐 대수란 말인가. 외려 더 매력이 있는 경우도 있지 않나?

반면 외유내강(外柔內剛)은 대개 긍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겉은 부드러워 보이는데, 속은 굳세다는 것. 이 역시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니던가. 해석하기 나름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신문에서 어떤 기업인이나 정치인에 대해 “‘외유내강형 리더십’을 지녔다”며 상찬하는 기사는 퍽 자주 보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라. “이 경제수석은 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일자리기획비서관과 기획재정부 제1차관 등 경제 분야 주요 직위를 거친 정통관료 출신으로 경제정책에 대한 전문성과 외유내강형 리더십을 갖추고 있어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등 3대 핵심 경제정책의 성과 창출을 가속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최근 임명된 신임 이호승 경제수석에 대해 설명한 구절 중 일부이다. 청와대 경제수석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설명할 때 ‘외유내강형 리더십’은 ‘경제정책에 대한 전문성’과 거의 비슷한 반열에 올라와 있다. 반면 ‘표리부동형 리더십’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게다.

개인적으로는 표리부동한 사람이 참 좋다. 이건 또 무슨 궤변이냐고 따져 묻는 독자가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찬찬히 읽어주시라.

겉으로는 평범한 대기업 직원이지만, 속으로는 조금 철이 없어 보일지언정 예술가적 고뇌를 가득 안고 사는 박모 사원. 다소 보수적인 직장에서 제복에 가까울 정도의 옷차림과 정갈한 머리스타일로 출근하지만, 주말에는 웬만한 남성 동료보다 더 거친 운동에 빠져 지내는 서모 대리. 겉보기엔 강한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장남이지만, 쉬는 날에는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밑줄 쳐 가며 읽는 영원한 문학청년 이모 팀장. 이런 사람들이 참 좋다. 오, 표리부동의 찬란한 미학이여!

다른 ‘속’이 있어야 ‘겉’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다. ‘속’마저 ‘겉’과 진배 없어지면, ‘겉’이든 ‘속’이든 금세 지쳐 버리기 십상이다. 더 다양한 ‘속’을 발굴해내자. 회사에서, 학교에서,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지친 하루를 보낸 ‘겉’을 위무해줄 수 있는 건 내안의 또 다른 자아인 ‘속’이다. 외유내강이든, 내유외강이든 자신의 내적 특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니 표리부동한 자신을 자책하지 말자. 도리어 ‘표’와 ‘리’의 차이를 더 벌려 보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잠재한 다채로운 자아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보길 권한다.

치자(治者) 입장에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선호한다. 그래야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과 다른 나의 속에 대해 누군가에게 소상히 설명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없다. 이 내밀함이 전제될 때 나의 속은 더욱 건강해지기 마련이다.

표리부동한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겉과 다른 그 속이 불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이어서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여러 얼굴을 갖고 있는 내 안의 또 다른 영혼에게도 숨 쉴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또 표리부동하다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이 한 말을 입장에 따라 뒤집는 행태는 겉과 속이 다르다기보다는, 그저 그 행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비난을 받으면 된다.

표리부동은 때때로 창의력의 원천이 될 수 있고, 동기부여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의 또 다른 속이 참으로 소중하다. 오늘도 표리부동한 내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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