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직필] 북한 인민군이 해체되고 있다
1948년 9월 인민공화국 창건 시절에 북한은 이미 소화기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는 김일성이 최초로 생산된 AK 보총을 민족보위성 간부들에게 수여하는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1930년대 북한을 중국침략의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해 중공업을 건설하였다. 때문에 해방 당시 북한은 남한과 비교할 때 월등한 공업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이 1968년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 이후 자주국방 노력을 시작한 것과는 차이가 많았다. 오늘날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당한 기술수준은 이러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당시 민족보위상은 최용건, 총참모장은 강건, 김일은 문화훈련국장이었고 김책은 산업상으로 군수산업을 관장하였다. 이들이 김일성 권력을 떠받치는 지주(支柱)-사천왕이었다. 최용건은 김일성보다 나이가 12세 위로서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이 사장(師長)일 때 군장(軍長)이었고 88여단에서는 김일성이 대대장일 때 여단 정치위원으로 한 등급 위였으므로 이들 가운데 장로적 존재였다. 강건은 김일성과 같은 대대장, 김책은 대대 정치위원이었다. 김일성과 이들은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이래의 동지로서 굳은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김일성 권력의 철벽이 되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주도한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은 이들 김일성 그룹과 출신과 경력이 달랐다. 1940년대 초 일본군을 탈출한 이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았고 연안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수뇌와 접촉하여 정치사상적으로 김일성 무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들은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공격이 이루어진 데 영향을 받아 중앙위원회에서 김일성을 공격하였다. 기습을 받은 김일성파는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최현은 무력으로 대회장을 봉쇄하고 사천왕을 중심으로 연안파를 제압하였는데 이는 공산독재체제에서 표 대결로 정권을 뒤집는다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를 보여주는 일화에 그치고 말았다.(흐루시쵸프가 브레즈네프 등에 의해 정치국에서 표 대결로 물러난 것은 소련 공산당이 그만큼 진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북한에서 철수한 것은 1958년이지만, 중공군이 북한 권력투쟁에 개입해줄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사태 후 소련은 미코얀, 중국은 팽덕회를 보내 김일성을 달랬고, 무정 등 연안파는 중공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이것이 김일성이 겪은 유일한 정권에 대한 도전-8월종파 사건으로서 사천왕(四天王)은 김일성의 호위무사임을 증명하였다.
지금 김정은이 과연 할아버지와 같은 듬직한 보루(堡壘)를 가지고 있는가? 천만에! 모두들 각자의 생존에 급급할 뿐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독제체제를 떠받치는 정보망에 걸리지 않으려 충성경쟁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김정일에 바치던 잣나무를 둘러싸고 보안원과 인민군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인민군 수십명이 총살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정은 체제가 종막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충격적 사건이다.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로 유지되던 군도 이제는 각자 구명도생(苟命徒生)하는 ‘만인은 만인에 대하여 이리’인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주변의 호위대나 연명시키고 있는 상태에 도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고금에 통제를 잃은 군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성역이 없어진 인민군이 급속히 해체되어 가고 있다.
국회 해산 요구가 운위되는 최악의 정치불신 속에서 정부와 군은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