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스페인 민주주의 어떻게 지켜졌나?

 
스페인 민주화 기수 수아레스?전 수상?23일 별세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이 1975년 11월 사망한 후 36년간의 파시스트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룩해낸 아돌포 수아레스 전 수상이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1981년 2월23일 무장군인 2백명이 스페인의 국회의사당에 들이닥쳐 수아레스 수상과 의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수아레스 수상이 의연히 버티는 모습도 당당하였지만, 의원들이?모두들 엎드려 있는데 한 예비역 육군중장 출신 의원이 “너희들이 감히” 하며 홀로 호통치는 것이었다. 마침 개원식이 진행 중이어서 모든 것은 텔레비전으로 생생히 중계되었다.

쿠데타군은 왕궁으로 몰려가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게 쿠데타 재가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국왕이 거사를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국왕은 쿠데타군에게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하면서 버티었다. 이날 저녁 국왕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간신히 얻은 민주주의를 지켜달라”고 국민에 호소하였다. 수백만의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쿠데타 병력은 다음 날 백기투항했다.

이는 마치 옐친이 고르바쵸프에 반기를 든 쿠데타군을 모스크바 시민의 힘으로 제압한 것과 같다. 이들 쿠데타는 바로 앞의 한국의 12·12와 비슷했다. 그러나 차이는 최규하는 카를로스가 아니며, 옐친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코 총통, 수아레스 수상 그리고 카를로스 국왕
 
1987년 카를로스 국왕이 영국을 국빈방문했다. 윈저성에서 벌어진 의장행사와 국빈만찬은 유럽 왕가문화의 찬란함의 극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과 부군 필립 공, 카를로스 국왕, 소피아 왕비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피를 받은 인연을 강조하며 각별한 친근감을 표시하였다. 찰스와 다이아나는 물론 참석한?영국의 왕족, 귀족들이 이들과 모두 한 가족 같았다.

유럽에서는 “아프리카는 (스페인과 프랑스를 가르는) 피레네 산맥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오랜 동안 무어인의 지배를 받아 사라센문명에 젖어 있던 스페인은 유럽인에게 대체로 생소하였다. 그보다도 스페인 내란과 뒤를 이은 프랑코 독재 하의 스페인은 유럽 문명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스페인이 유럽의 일부로 받아들여진 것을 상징하는 것이 카를로스 국왕의 영국 국빈방문이었다.

스페인 내란은 미국의 남북전쟁이 그렇고, 우리의 6·25전쟁이 그렇지만, 내란이 얼마나 참혹하며 내상(內傷)이 얼마나 길게 남는가를 보여준다. 이 와중에서 독일은 재군비로 확충된 비행기와 탱크 등을 시험하여 2차대전을 준비하였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이때를 고발한 것이다. 박정희의 10월유신도 프랑코나 장개석과 같이 대원수(Generalissimo)가 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대원수(大元帥)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본다. 모두 시대착오적인 발상들이다. 그러나 프랑코가 카를로스 왕자를 후계자로 삼아 스페인의 앞날을 맡긴 것은 특기할 만하다. 수아레스 수상도 프랑코 밑에서 성장한 ‘프랑코주의자’였지만 카를로스 국왕과 협력해 스페인의 법치와 민주주의를 이끌었다.

수아레스는 프랑코 총통 밑에서 국영방송사 사장을 지냈던 인물이었으나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국가 통합을 위해 그에게 스페인 민주화의 중책을 맡겼다.

수아레스는 1, 2차 내각을 거쳐 1981년까지 총리를 지내면서 스페인이 프랑코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데 가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2007년 스페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수아레스는 프랑코 사망 이후 역대 총리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뽑혔다.

수아레스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된다고 한다. 국장이란 이런 위인에게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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